메아리

의성 고을의 독행(篤行)과 열행(烈行)

의성신문 2022. 10. 7. 10:31

금년 가을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기온이 30°를 오르내리니 모두들 이상 기온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태풍 힌남노가 포항, 경주에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났으며 달아서 난마돌이 따라서 올라왔으나 원줄기가 일본으로 직진하고 우리나라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내일 모레는 밤낮의 길이가 같다고 하는 추분(秋分) 절기다. 천체의 기상은 예측할 수가 없다.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강해서 아침 산책을 나가다 돌아와서 조금 두터운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이때를 두고 옛날 어른들은 다음의 시를 읊었다.

 

新凉入郊外 서늘한 바람 들녘에서 불어오고

草虫秋近床 풀벌레 침상 가까이서 우네

燈火漸可親 등불을 점점 가까이하고

可讀数巻書 몇 권의 책을 읽을 지니라

 

이제는 말뿐이지 몇 줄의 글을 읽을 의지도 없고 기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유행가 가사처럼 벽시계는 고장이 났어도 세월은 쏜살같이 달린다.

요즘 TV를 돌리면 정치판은 어수선하다. 여야(與野)를 가릴 것 없이 까마귀의 자웅(雌雄)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삼가리를 풀어헤친 것 같다. 나는 모르는 낮말 스토킹은 왜 그리도 많은지 한마디로 말세 풍조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들의 언어 행동은 우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 불안하기만 하다.

각설하고 우리 고을 의성에 독행지사(篤行志士)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휘는 이희준(李羲峻)이요. 자는 명중이고 호는 혜계(惠溪)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1868년 가음면 가산동에서 서규(瑞圭)5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여 이웃과 돈독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봉사 정신이 남달리 강했다. 태어날 때부터 여유로운 가정환경에서 다복하게 살아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들으면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며 재산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구해준 일이 자주자주 있는지라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소작인들에게도 곡수를 상례보다 적게 징수하고 토지를 한번 주게 되면 그 사람의 살림이 늘어나서 넉넉해질 때까지 안심하고 농사짓게 배려하는 성품이다.

1931년 신미(辛未)년에는 큰 흉년이 들어 소작인들이 식량 기근에 허덕이자 그들 수백 명에게 곡수를 받지 않는 은혜를 베풀었으며 이듬해 이른 봄에 파종할 종자가 없어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자기 집의 곳간을 헐어 볍씨 종자를 무상으로 고루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은혜를 입은 영세 농민들은 공의 은혜에 감사하고 가난을 면해보고자 부지런히 일하여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해의 추수 추경이 끝난 초겨울에 그들 여러분이 뜻을 모아 성금을 모금하여 시혜(施惠)의 기념비를 세우고 아담한 전각까지 마련하여 지금도 면내 장기동 한 길가에 서 있어 그 선행을 기리고 있다. 193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옛날의 풍습에는 독행(篤行)에 못지않게 열행(烈行) 정절을 높여 기리였다.

다음에 열행 한 편을 소개한다. 한평생을 소복으로 수절한 안동김씨는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후손으로 18933월에 다인면 송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어른들의 훈계 말씀을 명심하고 집안일을 민첩하게 도우며 자라났다. 언제나 몸을 정결하고 단정히 하며 예의 바른 행동으로 처신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며 동기간에 우애를 불러일으키고 곱게 자라서 17세에 김해인 현규(顯圭)와 결혼하였다.

이 무슨 악마의 작란인가 결혼 3일 만에 남편과 사별(死別)하는 불운을 당하였다. 온 집안이 경황없는 가운데 슬픔은 망극하였지만 태연자약한 태도를 지키며 시신운구의 뒤를 따라 정중하게 처신하였다. 예절에 어긋남 없이 3년 상을 마치니 여러사람들이 높이 기리었다.

당시 친시양가의 어른들이 청춘의 나이가 있으니 첫정의 마음을 거두고 개가(改嫁)를 권하였지만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거절하고 시어머니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시어른과 상의하여 처신하였다. 여부를 자주 물어서 음식의 봉양에도 정성을 다하여 추호의 착오 없이 양순한 부덕을 한결같이 지켜왔다. 시숙은 어려운 살림을 잘 꾸리고 계수의 마음을 거슬리지 않으며 보살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맛동서가 쌍태남아를 출산하여 고이 기르고, 네 살 된 낙배(洛培)를 양자(養子)로 삼아 분가하였다. 간구한 살림이지만 큰 집의 보살핌을 받고 그런대로 살림을 다듬어 평온하게 살았다. 한평생 소복을 입고 농사지으며 길쌈하고 산채 야채를 반찬으로 삼아 어려운 일을 능히 처리하고 깨끗하게 살았다. 양자 낙배를 키워 19세에 결혼시키고 새로 맞은 며느리와 의좋게 지내며 단란하게 살았다. 아들이 22세 때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활하고 있었다. 종옥(鐘玉), 태옥(泰玉) 두 손자를 키우면서 노후를 보내다가 1966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뒤 아들 낙배가 귀국하여 당시 큰선비 선성 김국현(宣城 金國鉉)의 비문을 받아 효열부안동김씨지비(孝烈婦安東金氏之碑)를 세워 어머니의 효열행을 세상에 밝혔다.

! 임금은 명령하고 신하는 복종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유순하며 시어머니는 인자하고 며느리는 순종하는 것이 평상적 윤리 강상의 예도이다.

돌아보면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지금은 첨단과학의 사회로 변천하여 어제가 옛날같이 급변한다.

불변이응만변(不變而應萬變)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도덕 사회의 기율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