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인간사에 좋은 징조를 길조(吉兆)라 하고 그를 상징하는 새를 길조(吉鳥)라 한다. 사람들은 까치를 길조라고 말한다. 반대로 좋지 못한 징조를 흉조(凶兆)라 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새를 흉조(凶鳥)라 하며 까마귀를 흉조로 분류한다.
까치와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까치와는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골의 한적한 집에서 아침잠을 깨고 동쪽 문을 열고 나면 감나무 가지에서 까치 울음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날이 있다. 그날은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분이 맑고 상쾌하며 오늘은 어디서 반가운 손님이 오시려나 하면서 동쪽 하늘을 쳐다보고 흔연해 한다.
까치와 사람은 생태가 완전히 달라도 가까이에서 간접적으로 의사를 통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우리의 생활 상태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사고에는 까치라는 새가 인간에게 유해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국전력에서는 까치집이 전기줄과 얼키어 이를 제거하려고 많은 인력과 시간을 드려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문제점을 삼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 인간에게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나뭇가지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까치집은 무서운 태풍과 소나기가 쏟아져도 손상 없이 부지한다. 동산 위의 참나무에 걸려있는 그 집은 몇 해나 되었는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설계가 매우 정교하고 튼튼한 모양이다.
만물의 명장인 사람이 지은 아파트는 짓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으려니와 지어서 입주해도 부실공사로 누수도 있고 벽에는 금이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까치집의 설계기술을 배워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까마귀는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검은 새이다. 갈까마귀, 떼까마귀 등의 종류가 있으며 사람과 멀지 않는 거리의 나무에 집을 짓고 썩은 식품을 잘 먹으며 울음소리는 듣기에 흉하다. 하지만 자기를 키워준 엄마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먹이를 물어다 구어 반포조(反哺鳥) 또는 효조(孝鳥)라고 한다.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까마귀가 검다고 마음까지 검겠느냐 겉모양이 검고 누추해도 마음까지 악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고려말의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다음의 시조를 읊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말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아마도 겉하고 속 검은 것은 너 뿐인가 하노라” 까마귀가 오디를 마다하나 특별히 즐기는 음식을 어쩌다가 사양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까마귀 알 물어다 감추듯 한다. 그는 알을 물어다 감추고 나중에는 어디에 감추었는지 모른다는 뜻으로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건망증이 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아무 관계 없이 한 일이 우연히 다른 일과 때가 맞아 들어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오해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한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면 반갑다. 객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더욱 반갑다는 말이다. 까마귀 학이 되랴? 아무리 애를 써도 타고난대로 밖에 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까치는 길조(吉兆)요. 까마귀는 흉조(凶兆)로 생각한다 고시 한수를 적어본다.
작조비위희(鵲噪非爲喜) 까치 지져긴다고 기쁜 일 있을 수 없고
아명기시흉(鴉鳴豈是凶) 까마귀 울어댄다고 어찌 흉한 일 있으랴
인간흉여길(人間凶輿吉) 인간사 좋고 나쁜 일들
부재조성중(不在鳥聲中) 새의 울음 속에 있지는 않다고 하네
산과 들, 샘과 바위 사이를 거닐면 속세의 어지러운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시와 서 그림 속에서 노닐면 속된 기운 점점 사라진다. 그러므로 참된 사람은 비록 가을을 완상하다가도 본뜻을 잃지 말아야 하며 또한 풍만한 경지를 빌어서 마음을 조화시켜야 한다.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니 속세의 마음 사라지며 글이나 그림을 즐기면 저속한 기운 없어진다. 그러므로 참된 사람은 때때로 아름다운 정취를 보고 마음을 길러야 한다.
상양(徜徉), 배회(徘徊), 소요(逍遙) 등의 말은 대동소이한 말이다. 목적 없이 방향 없이 다니는 뜻이 같은 사람들이 완물상지(玩物喪志)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본심을 잃는다는 뜻이다. 곧 성스러운 경지에서 마음을 조화하고 정신을 기른다는 이야기다.
봄날은 기상이 번화하여 마음을 넓고 크게 만들지만, 가을날의 흰 구름은 맑은 바람 속에 난초가 아름답고 계수나무가 향기로우며 물과 하늘이 한가지 색이 되고 천지에 달이 비춰서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맑게 함만 같지 못하다. 봄날은 일기가 화창하여 우리의 심신을 여유롭게 하며 가을날은 맑고 상쾌하여 마음을 산뜻하게 한다.
중국의 4대 명문장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와 왕발(王勃)의 등왕각 서문과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를 말한다.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사람인 왕발은 등왕각 서문이란 명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이 글은 당나라의 고조인 이연(李淵)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등왕(滕王)으로 봉해지고 홍주도독이 되어 지금의 강서성 남창부 장강문(長江門) 밖에 유명한 누각을 짓고 등왕각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고종 때 염백서(閻伯嶼)가 이 누각을 중수하고 중구절(重九節)에 그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염백서는 사위인 오자장(吳子章)의 글솜씨를 자랑하고자 미리 서문을 써놓게 하고 연회에서 모든 손님들에게 중수기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창졸간이라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왕발이 자리에 참석하고 혼자서 글을 짓게 되었다. 처음에 염백서는 왕발을 우습게 보았으나 왕발의 글이 중간쯤에 이르러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빛이로다.” 낙하여고목제비(落霞如孤鶩齊飛) 추수공장천일색(秋水空長天一色)이란 대목에 이르러 염백서는 감탄 찬탄하고 완성되자 마침내 크게 연회를 열어 왕발의 천재를 세상에 드날리게 했다. 는 고사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늙어서 머리털과 이가 빠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고민할 것 없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 본성의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 장자(莊子)는 다음의 말을 하였다. “삶에 대립하여 죽음이 있고 죽음에 대립하여 삶이 있으며, 가능에 대립하여 불가능이 있고 불가능에 대립하여 가능이 있으며, 옳음에 기인하여 틀림이 있고 틀림에 기인하여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러한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시비와 생사와 가와 불기는 본질적으로 구별이 없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까치란 새의 길조와 까마귀란 새의 흉조도 역시 같은 이치이다. 어찌 그것으로 화복을 점칠 수 있으랴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갈 뿐이다.
20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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