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新聞은 한 時代의 길잡이다

의성신문 2017. 3. 31. 13:23

新聞은 한 時代의 길잡이다


        
1990년 3월 31일, 의성군민(義城郡民)의 여망(輿望)을 모아 창공(蒼空)에 한 줄기 광명(光明)의 빛을 밝히고 언론(言論)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7년. 이는 곧 의성(義城)의 역사요, 의성군민의 애환(哀歡)이었다. 의성신문은 27년간 긴 여정(旅程)을 의성군민과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면서 언제나 그들의 다정한 이웃이었고, 삶의 길잡이였다. 그리고, 오늘을 현명하게 투시하고, 내일을 예언하는 지혜를 선물하였다. 언제나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지표(指標)를 제시하는 의성군민의 안내자였다.
의성신문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27년이라는 긴 여정을 변함 없이 묵묵히 걸어오면서 의성군민의 눈과 귀로서의 소임을 다해왔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험난한 길에서도 앞으로 전진한다”고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겸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 1795~1881)의 말이다.
 
또, 오는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 날은 신문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목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이 창간된 날인 4월 7일을 기념하여 제정하였다. 독립신문은 서재필(徐載弼)에 의하여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었는데, 이는 근대화(近代化)의 횃불을 든 일대 쾌거였다. 창간호에서 독립신문을 통한 ‘민중(民衆)의 계몽’과 ‘만민평등(萬民平等)의 사상’을 펴나가고자 하였으며, 그리고 영문판에서는 ‘조선(朝鮮)의 사정’과 ‘조선인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려는 의지를 밝히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신문의 창간이 그 당시의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참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독립신문은 1896년 7월 2일에 설립된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짝을 이루어 민중의 계몽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앞장섰다. 이 무렵의 신문을 말하려면, 1898년 9월 5일에 남궁억(南宮檍)과 나수연(羅壽淵) 등에 의해서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는 일본공사(日本公使)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군에 의해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정세(政勢)가 참으로 암담할 때였다. 더욱이, 궁궐에서 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던 고종(高宗)은 자신과 왕실(王室)의 안위(安慰)에 대한 불안을 느껴 세자(世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가 1896년의 일이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로써 우리나라는 일본과 러시아간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때야말로 민중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황성신문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표방하고 창간된 것이었다. 이 때, 남궁억을 비롯하여 류 근(柳瑾)ㆍ박은식(朴殷植) ? 장지연(張志淵) 등이 날카로운 필봉(筆鋒)으로 항일(抗日)의 선봉에 섰다. 황성신문은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베델(Bethell, E. T. : 한국명 裴說)과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짝을 이루어 항일언론(抗日言論)으로서 민중의 계몽에 앞장섰다. 그래서, 이 두 신문이 불을 토하는 듯한 논설로써 일본의 침략주의를 공격하면서 민중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토록 하였다.

 

義城郡民과 哀歡을 같이 하다


이 두 신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본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일본에 대하여 부당함을 성토하였다.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로, 대한매일신보는 “칙어엄정(勅語嚴正)과 칙약무효(勅約無效)”라는 사설로 일본의 잘못을 가차없이 꾸짖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1919년 3ㆍ1만세운동이었다. 우리 2천만 민중이 하나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일제(日帝)의 총칼 앞에 분연히 일어섰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이었던가. 서울에서, 평양에서, 대구에서, …. 전국 각지로 파급되었다. 어린 여학생들도, 부엌에서 밥 짓던 아낙네들도, 거리의 상인들도, 상투를 튼 시골 노인들도 …, 상하 ? 귀천도, 남녀ㆍ노소의 구별이 없었다. 우리 2천만 겨레가 하나 된 부르짖음이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민족의 피맺힌 절규(絶叫)였다.   
3ㆍ1만세운동의 함성(喊聲)은 전(全)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세계의 이목(耳目)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더욱이, 이에 놀란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들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무단정치(武斷政治)로는 한민족(韓民族)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이로써 일제는 총독(總督)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로 하여금 이른바 문화정책(文化政策)을 펴게 하였다.


사이토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언론ㆍ출판 및 집회에 대한 제약을 완화한다는 유고문(諭告文)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있은 후, 192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朝鮮日報)가, 4월 1일에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되어 민중에게로 다가갔다. 이 두 일간신문이 창간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민중계몽운동’이었다. 조선일보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한글보급운동을, 동아일보는 ‘브 나로드(民衆 속으로)운동’을 펴나갔다. 이로써 10여년간 신문 없는 암흑시대에 살던 민중들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두 신문이 걸어온 발자취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자체적으로 경영난이라는 난관에 부닺치기도 하고, 그리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이겨내야만 했다. 1945년 8월 광복(光復)을 맞이할 때까지 기사(記事)의 삭제ㆍ판매금지, 때로는 압수ㆍ정간과 폐간을 당하면서 지령을 더해왔으니, 그 어려움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의성신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의성신문은 지난 27년간 의성군민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의성 역사의 산증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왔다. 그러나, 이에 머물지 말고 지나온 27년을 되돌아보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부족함을 보완하여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신문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의성군민의 바람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대화의 장(場)을 마련하고, ‘활력 넘치는 희망 의성’의 발전을 견인하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