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民世 安在鴻의 新民族主義를 말한다

의성신문 2017. 3. 6. 10:49

民世 安在鴻의 新民族主義를 말한다

 


1965년 3월 1일, 이 날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올해가 그의 52주기(週忌)가 되는 해이다.

그런데, 민세는 일생을 참으로 기구하게 살았다. 그는 혹독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국내에서 살면서 때로는 일본의 회유를 물리쳐야 했고, 또 비타협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지조(志操)를 지켜나갔다.


민세의 이러한 삶의 시작은 1914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915년 중앙학교(中央學校) 학감, 1917년 중앙기독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거쳐, 1924년 9월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입사하여 언론인(言論人)으로서 그의 항일사상(抗日思想)을 펼쳐나갔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주필, 부사장,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사설(社說)과 논설(論說)을 발표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항일사상을 민중들에게 전달하였다. 그의 이러한 언론활동은 1932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그는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깊이 관여하면서 민족지도자(民族指導者)로서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3 ‧ 1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일제(日帝)에 의하여 회유 당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의 단결이 절실한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민세는 이상재(李商在) ‧ 권동진(權東鎭) ‧ 신석우(申錫雨) ‧ 김준연(金俊淵) ‧ 문일평(文一平) ‧ 신채호(申采浩) ‧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급진적 ‧ 투쟁적 행동강령의 실천에 앞장섰다. 이로써 민세는 조국광복(祖國光復)이라는 커다란 등짐을 지고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가혹한 일제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비타협적 자세로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민세는 이 시기에 민족주의(民族主義) 진영과 사회주의(社會主義) 진영의 통합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라는 그의 새로운 정치사상(政治思想)을 싹틔우게 되었다. 그는 신간회가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흔들림없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이를 토대로 한 항일운동에 매진하였다.

민세의 신민족주의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장점을 수용하는 정치사상으로서, 1945년 9월 1일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을 창당하면서, 앞면에 내세웠다. 이로써 “균등사회 ‧ 공영국가를 지향 ‧ 완성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민세의 신민족주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조화롭게 통합하여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이 광복 후 ‘좌우합작’(左右合作)이라는 정치노선(政治路線)으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民世 安在鴻은 누구인가?

 

민세는 1891년(高宗 28년) 12월 30일(음력 11월 30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현재 平澤市)에서 순안안씨(順安安氏) 집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1907년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진흥의숙(進興義塾)에 입학하여 세상물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서울로 올라가서 황성기독청년회(현재 서울YMCA) 중등부에 입학하여, 신학문에 접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무렵 개화지식인(開化知識人) 이상재(李商在) ‧ 남궁억(南宮檍) ‧ 윤치호(尹致昊)로부터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民族)의 현실에 눈떠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나라의 사정은 참으로 암울했다. 1894년 1월에 전라북도 고부군수(高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貪虐)에 항거하는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로 민심(民心)이 흉흉한 가운데, 7월에는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침입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을 시작으로 일본의 조선(朝鮮)에 대한 내침(來侵)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듬 해 10월에는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일본공사(日本公使)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에 의해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져 전국에 항일구국운동(抗日救國運動)이 일어나 척왜(斥倭)의 물결이 세상을 흔들어놓았다.


이러한 상황에 일본은 나날이 우리의 조정(朝廷)을 옥죄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徐載弼)이「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민권사상(民權思想) ‧ 평등주의(平等主義) ‧ 민족주의(民族主義)를 제창하면서 민중의 계몽과 사회의 발전에 앞장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같은 해 7월 2일 이상재 ‧ 윤치호 ‧ 이승만(李承晩) ‧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자립을 표방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에 서울 종로(鐘路)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주국권운동(自主國權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해 10월 29일에는 제2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국정(國政)에 관한 6개항의 개혁안(改革案)을 채택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에게 상주(上奏)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 체결되고, 나라의 명운(命運)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에 일본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이 노골화되었으며, 외교권(外交權)마저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나라가 있으나 껍데기만 남았다. 초대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임하여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를 설치하고, 우리 조정을 더욱 옥죄어왔다. 이것은 한 ‧ 일 병합(倂合)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1910년 8월 29일, 오호 통재라! 삼천리금수강산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1911년 9월, 이러한 참담한 나라의 사정을 지켜보고 있던 민세는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 1914년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때, 그의 머리를 맵도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였다.

민세의 이러한 꿈은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설과 논설을 통해서 민중(民衆)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조선일보의 주필로 재직하던 시기인 1927년에 신간회 창립에 깊이 관여하면서 그의 꿈은 한층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민세의 원대한 꿈은 1950년 6 ‧ 25전쟁 중 북한군(北韓軍)에 의하여 납북(拉北)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역사(歷史)에는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지만, 민세가 꿈꾸었던 통일대한민국이 탄생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