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囚人의 아버지’ 金洪燮의 精神世界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 금산리에서 가난한 농가(農家)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그리고 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참으로 어둡고 암담한 시절이었다.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倂呑)하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총독(總督)으로 하여금 입법권ㆍ행정권ㆍ사법권을 행사케 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데라우찌 마사다게(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新民會)의 유력인사들을 검거해 갖은 고문을 자행했던 ‘105인 사건’으로 나라가 뒤숭숭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國權回復運動)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13년 4월, 하와이(Hawaii)에서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가, 5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흥사단(興士團)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나날이 세(勢)를 확대해 갔는데, 1918년 12월에는 미국의 교포사회에서 파리평화회의(Paris平和會議)에 이승만(李承晩)ㆍ정한경(鄭翰景)ㆍ민찬호(閔璨鎬)를 우리나라 대표로 파견하였다. 이는 우리 동포들이 조국광복(祖國光復)의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ㆍ1만세운동의 불길은 철도교통망을 따라 빠르게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평북ㆍ평남ㆍ황해도의 주요도시에서는 서울에서와 같은 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나갔으며, 삽시간에 군ㆍ읍ㆍ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남부지방의 경우에는 5일에 전북 군산에서, 8일에는 경북 대구에서, 10일에는 전남 광주에까지 확산되었다.
이처럼 일제(日帝)의 탄압과 우리의 국권회복운동이 반복되던 1926년에 김홍섭은 열한 살 나이에 원평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식민지(植民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해 4월에는 조선(朝鮮)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순종(純宗)이 승하(昇遐)하면서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고조되어, 6월 10일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인천ㆍ개성ㆍ평양ㆍ신천ㆍ원산ㆍ정주ㆍ대구ㆍ공주ㆍ홍성ㆍ당진ㆍ강경ㆍ고창ㆍ순창ㆍ전주ㆍ마산ㆍ하동 등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또,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세상에 눈떠갈 무렵의 김홍섭에게는 참으로 가슴벅찬 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무렵 김홍섭은 면소재지에 있는 금산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종교적(宗敎的)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생 동안 그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지배하는 신심(信心)이 키워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6~7세의 어린 시절에 그를 아주 귀여워해주던 외삼촌(外三寸)을 떠나보내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민했던 흔적도 보인다. 이 또한 그의 정신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救援을 향한 信心을 펴다
1953년 9월 26일, 김홍섭은 명동성당(明洞聖堂)에서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바오로’가 그의 영세명(永世名)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가톨릭으로 개종(改宗)한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종파(宗派)가 문제되지 않았다. 소년시절부터 종파를 떠나 각종 종교서적을 탐독하면서 신심을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홍섭은 세상에 눈떠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고민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가난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에 링컨(Lincoln, A.)의 전기(傳記)는 김홍섭에게 많은 깨달음을 선물했다.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독학으로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고, 또 대통령이 되다니’, 링컨의 생애(生涯)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법조인(法曹人)의 꿈을 갖게 하였으며,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가 1935년의 일이었다.
김홍섭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1939년,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니혼(日本)대학 전문부에 진학하여 법학(法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에는 조선변호사시험(朝鮮辯護士試驗)에 합격하고, 귀국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리고,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와의 만남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열어가게 했다. 1941년 4월, 가인을 모시고 서울에서 변호사업무를 시작하였다. 이 때, 가인은 항일변호사(抗日辯護士)로 명성(名聲)을 얻고 있었다. 민족계몽운동단체(民族啓蒙運動團體)인 신간회(新幹會) 회원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억울함을 겪고 있는 동포들을 위하여 무료변론에 온몸을 바치고 있던 항일변호사였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홍섭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1945년 10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받게 된 것도 가인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사직은 김홍섭에게 커다란 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많은 변화를 거듭한다. 검사 김홍섭에서 농사꾼 김홍섭으로, 다시 서울지방법원 소년부 판사로 옮겨갔다. 이러한 역정에 있어서도 가인의 권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섭의 판사시절로 되돌아가보자. 그는 가끔 자신에게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고뇌에 찬 질문이었다. 그는 교도소(矯導所)에서 사형집행(死刑執行)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死刑囚)들을 찾아가 함께 고뇌했던 ‘수인(囚人)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56년 ‘김창룡 특무대장 살해사건’의 주범 허태영 대령과의 특별한 만남이다. 김홍섭과 사형수 허태영과의 만남은 영적(靈的)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허태영은 김홍섭의 구도자적(求道者的) 심성(心性)에 자극을 받고,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세례명 ‘마테오’, 김홍섭이 대부(代父)였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마테오 허태영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1957년 9월 24일, 허태영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자유당(自由黨) 시절 천하를 주름잡던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의 살해범 허태영과의 만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바오로 김홍섭, 그는 참으로 깨끗하게 살다가 하늘 나라로 갔다. 그 때가 51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부디 천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빌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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