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이 날은 노예해방(奴隸解放)을 선언한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1865년의 일이다. 올해가 그의 서거(逝去) 152주기(週忌)가 되는 해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1865년 4월 14일 저녁 10시경 워싱톤(Washington D.C.)의 포드극장(Ford's Theater)에서 부인과 함께 「우리 미국인 4촌」(Our American Cousin)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던 중 배우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그 다음 날 오전 7시 22분(현지 시각)에 숨졌다. 부스는 메릴랜드(Maryland) 출신으로 그 당시 최고의 배우였는데, 남부연방(南部聯邦)을 지지하는 열광적인 자로서 이 엄청난 일을 저질르고 말았다. 이로써 미국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
그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링컨은 1861년 3월 4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노예(奴隸) 문제로 말미암아 남부(南部)의 여러 주(州)가 잇달아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을 탈퇴하여 남부연합(南部聯合)을 결성함으로써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링컨에게 있어서는 남부의 이탈을 방지하고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런데, 4월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남부의 연합군(聯合軍)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lrolina州) 섬터(Sumter) 요새(要塞)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the Civil War)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은 북부의 연합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치루어야했는데, 이 전쟁은 밀고 밀리면서 4년간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화당(共和黨)을 강력한 정당(政黨)으로 개편해나갔으며, 미합중국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1863년 1월 1일 그는 역사적인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하였다. 참으로 위대한 결정이었다. 그는 그 날 오후 2시 백악관(White House)에서 떨리는 손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한 문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선언서(宣言書)에 서명함으로써 내 이름과 영혼이 역사에 길이 남을 텐데, 서명할 때 손이 떨리면 훗날 이 서류를 보게 될 사람들이 내가 노예해방에 주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로부터 한 세기(世紀)가 지난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링컨기념관 앞에서 25만명의 청중들을 향하여 “한 세기(世紀)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 그 역사적인 선언은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의미심장한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외쳤다.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쓰여지는 의미있는 순간이었다.
民主主義의 理念을 선언하다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미국의 중동부에 위치한 켄터키주(Kentucky州)의 산골 작은 통나무집에서 가난한 농부(農夫)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농삿일을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삶은 참으로 가난했으며,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일곱 살 되던 해인 1816년 가을 미개척지(未開拓地)인 인디애나(Indiana)의 밀립지대로 이주하여 농지(農地)를 개척하면서 어렵게 살아가야 했다.
그는 어려서 가난 때문에 학교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채 독학으로 1837년 변호사시험(辯護士試驗)에 합격하였다. 그가 28세 때였다. 그 후, 그는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사무실을 개설하고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그는 주로 사회적 약자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변론을 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그리고, 링컨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지식을 쌓기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배우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이 때, 그는 많은 책을 읽었지만, 특히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George Washington : 1732~ 1799)의 전기(傳記)를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애국심(愛國心)을 키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무렵, 독서에 매료되어 있는 링컨을 보고 동료변호사들은 “링컨은 휴식을 모르는 야망(野望) 가득한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을 치르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1865년 4월 9일 남부 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Robert Edward Lee)가 버지니아아주(Virginia州) 아포마톡스(Appomatox)에서 북군 연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4년여 동안의 긴 남북전쟁은 북군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남북전쟁의 승리는 링컨이 1864년 11월 재선에 승리한 직후였다. 한편, 남북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1863년 11월 19일 펜실베니아주(Pennsylvania州) 게티즈버그(Gettysburg)국립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행한 링컨의 연설은 짧지만 참으로 강렬한 힘을 가진 명연설(名演說)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 때, 링컨의 연설은 “만민평등(萬民平等)의 터전 위에 미국을 건국한 선조(先祖)들의 고귀한 정신(精神)을 승화시키고, 그리고 이 정신을 이어가기 위하여 싸움터에서 명예롭게 죽어간 장병들에게 마지막 안식처(安息處)를 바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그 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이 나라를 하느님의 보호아래 새로운 자유(自由)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몸을 바치자”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이념(理念)을 선언한 「게티즈버그 2분 연설」이다.
링컨.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배운 부지런함과 정직을 교훈으로 삼고 살아가면서 미국의 위대한 정치인으로 만민평등의 리더십을 쌓아갔다. 그래서, 링컨이 서거한 150주기였던 2015년에 그가 서거한 4월 15일을 국가의 추모일(追慕日)로 정하고, 매년 이 날 포드극장에서는 남북전쟁 당시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화(弔花) 헌정식을 열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모든 시민들은 링컨의 서거일이 되면 그가 생전에 이루어놓은 업적을 떠올리면서 그를 추모하고, 그리고 그를 그리워한다. 그가 이루어놓은 인류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이념은 영원히 빛을 잃지 않고 우리의 앞길을 밝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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