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風起兮白雲飛하니 草木黃落兮雁南歸로다 蘭有秀兮菊有芳하니 懷佳人兮不能忘이로다 泛樓船兮濟汾河하니 橫中流兮揚素波로다 簫鼓鳴兮發棹歌하니 歡樂極兮哀情多로다 小壯幾時奈老何오.
이글은 고전명작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 전문이다.
풀어서 적어본다.
“가을바람 일고 흰구름 나르니, 초목은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고 기러기는 남쪽으로 돌아가도다,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로우니, 아름다운 여인 그리워하여 잊을 수 없도다, 누선의 큰배 띄워 분하를 건너가니, 중류를 가로지르며 한 물결 날리는 도다, 퉁소 소리와 북소리 울리고 뱃노래 부르니, 환락이 지극함에 슬픈 마음 많도다, 젊은 시절 얼마나 남았는가 늙음을 어이하리”
가을은 역시 애수의 계절이다.
겨울의 첫 절기 입동(立冬)이 지나고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 절기이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단풍놀이의 제안으로 홀연히 길을 나섰다. 향리에서 가장 가까운 천년 고찰이요. 16교구 본사인 고운사는 산객소인(酸客騷人)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일찍이 마음을 주고받는 이동필 전직 장관 내외분과 사)안동권발전연구소 이진구 소장님이 작반(作伴)이라 모두들 평소 존경하던 분들이며 심기상통이라 격식이나 허물없는 사이였다. 절의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느린 걸음으로 산보 하였다. 서리에 얼띤 갈참나무의 넓은 잎은 절반은 져서 바람에 나뒹굴고 이리저리 휘몰린다. 노란 단풍, 진홍 단풍이 석양빛을 받아 눈이 현란하다. 늙은이 심정에도 풍정은 있는지라 젊을 때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서 한 곡조 뽑으려 했지만, 목청도 터지지 않고 가사도 자신이 없어 혼자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낙엽이 정처 없이 떠나는 밤에, 절개로 얽어놓은 견우직녀성, 기러기 편지 주어 가슴에 전하기에, 열밤을 하루같이 불러 본 그 빛이요”
오늘은 휴일이 아니요, 정상 근무일이라 그런지 만추산사(晩秋山寺)의 고즈넉한 단풍길은 예상외로 한적하고, 이따금씩 두세 사람의 숙녀들이 정담을 속삭이며 오갈 뿐이다. 서리에 강한 노랑 상수리와 지고, 남은 은행잎이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사이사이 늙은 소나무는 거북이 등 같은 껍질을 몸에 감고, 만고상청의 절개를 과시하며 의연히 버티고 우뚝히 섰으니, 오히려 일시적 고운 단풍보다 운치가 돋보인다.
우리 고을 의성의 명현으로 증 이조판서와 충간공 시호를 받은 자암 이민환(李民寏)은 다음의 글을 문집에 남겼다.
고운사는 읍의 북쪽 삼십삼리에 있다. 최학사 고운(孤雲)이 일찍이 이곳에 노닐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의 자(字)를 따서 절의 이름으로 삼았다. 혹자 백성들이 고원(髙原)이라고 하나 잘못 전해진 말이다.하고 한시 한 수를 읊었다.
孤雲已乘白雲去 최고운은 이미 힌구름 타고 가버렸는데
比地空留古寺名 이곳에 헛되게도 절 이름만 남았도다
千載風神何所見 천년전의 아름다운 풍체 어디서 볼 것인가
滿山松月十分明 산에 가득 솔과 달 십분이나 밝구나
경사가 심하지 않는 잘 다져진 황토길이지만 1Km나 됨직한 거리를 쉬엄쉬엄 걸었으니 나이는 어이할 수 없는지라 숨이 차고 다리를 옮겨놓기도 무거움을 느낀다. 일행의 배려를 받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서 가운루와 우화루에 도달하였다. 겹친 피로를 풀고자 우화루 넓은 공간에 정결한 간이 찻집이 있고 네 사람의 한자리로 아담하게 정리되어있다. 몇 사람의 일행들이 있고 우리도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취향 따라 차를 주문하고 안동을 중심한 고사와 민속과 수필 문학 등 왕고래금(往古來今)의 설화를 나누며 이진구 관장님의 해박한 식견과 유창한 달변으로 싫증을 느끼지도 않았다.
훤칠하고 세련된 여자 손님 두 분이 들어오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을 군청의 총무계장이라 소개하고 자리를 잡았다. 매우 예절 바른 분이라고 마음으로 칭찬하였다.
작은 덧 시간이 흐른 뒤에 극락전 서편 요사체 툇마루로 일행을 인도하는 이는 역시 이 관장이다. 동쪽의 정면을 바라보며 저 산을 보십시오. 저 산이 바로 고운사의 주산인 등운산(騰雲山)이라 하였다. 지나쳐보던 산이지만 살펴보니 상현(上弦)의 달을 엎어놓은 듯이 아름답고 수려하다. 건너편 종각에는 불가의 법구(法具) 목탁과 목어가 걸려있다. 거기에 눈을 머무르고 살피면서 목탁 목어의 고사를 담론하고 물고기는 죽어도 눈을 감지 않으니 그래서 그를 경세(警世)의 불가 법구라 하였다.
돌아보면 아득한 옛날이다.
1956년의 여름 보리 추수를 마친 뒤였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하지 못하여 부주의한 탓으로 오른쪽 팔의 골절상을 입었다. 병원에 가서 기브스를 하고 팔을 어깨에 걸었다. 일손이 부족한 때이지만 편하게 쉬는 형편이 되었다. 부모님이 꾸려주신 행장을 등에 지고 차가 없는 시대이니 작은 고개 매남이제와 속칭 장제라는 큰 제를 넘어 등운산 중허리의 배넘이길로 고운사에 도착하였다.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요. 세월도 옛날이라 여름철에 쌀을 식량으로 하는 집안은 드물었다. 행장 속에는 밀가루와 보리쌀과 감자와 된장 간장이요 평소에 읽던 국사대관 등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짐을 풀어놓은 곳은 옆방에 남씨(南氏) 노승이 거처하는 작은 절이다. 수도가 없으니 개울의 샘물을 식수로 삼았으며 연료는 솔가지와 갈비(마른 솔잎) 등이다. 성품이 나태한 비재인지라 공부는 간곳없고 그저 두 달의 세월을 허송하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화려한 건물은 볼 수 없고 푸른 이끼가 덮이고 청태가 눌어붙은 기와가 얼기설기 덮여 있으며 밤이 되면 쥐들이 천정을 흔들고 난장을 쳤다.
지금 그 건물 자리에는 반듯하고 격식이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섰다. 진실로 금석(今昔)을 실감케 한다. 아!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와같이 큰 절간에 한 분의 스님도 여승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 일행이 그들을 찾지 않아서 그렇겠지 하였지만 약간은 허전함을 느낀다. 한시 한 수를 읊어 본다.
孟冬霜寒夕陽晴 첫겨울 서릿발에 석양햇빛 맑아서라
萧灑山寺楓林明 씻은 듯 깊은 절간 단풍잎 아름답다
千載騷客今不見 천년세월 시객들 지금은 어듸멘가
山髙谷深佛印名 산 높고 골 깊은데 부처님 자취 이름 높네
“비록 시골의 초가집에 살더라도 올바른 일을 행하면 복이 오래가고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수고롭게 성을 쌓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고승 의상조사(義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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