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제721호 사도(師道) 부재의 세상에 역사 속의 스승들

의성신문 2022. 3. 4. 14:04

성리학에 밝고 경세제민에 공이 있으며 임진왜란을 앞두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申氏)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현모(賢母)이다.

그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 여인이 덕망 인격 재주 학문을 겸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탁월한 인품과 재주가 아까워 친가에서 재질을 살려 공부를 시킨 것이다. 그가 만약 남자였다면 율곡보다 못하지 않는 큰 제목이 되었으리라 하는 이도 있다.

그는 많이 알았고 많이 배우고 느껴 민첩하여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임당에 대해선 잘 알면서도 그 배우자인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며 술과 놀이를 좋아하는 풍유꾼이었다. 덕망과 인격과 학문에 대해서 항상 사임당에 의존했고 배웠으며 존경하였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두 번이나 권유하다가 세 번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는 사임당의 단호한 태도에 굴복하여 서울의 본가에서 공부에 전념한 까닭으로 늦게나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원수가 말직의 벼슬인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관서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사임당 신씨는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가인박명(佳人薄命)인가 보다.

신씨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재취를 만류했다. 그런데도 이원수는 권씨(權氏)부인과 재혼했다. 그는 사임당과 같이 재예가 있고 현숙하지 못하며 도리어 요부형으로 악덕했다고 한다. 이때 율곡은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서 공부의 계기가 되었다. 이원수는 죽은 처 사임당의 만류가 있었는데도 재취 권씨를 얻었음은 죽은 신씨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남자로서 자존심은 언제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계모 권씨는 아버지 이원수가 사망하고 율곡의 효심에 감복하여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율곡은 자신을 낳아서 기른 사임당을 사모하고 계모 권씨를 이끌어 나감에 힘을 다했다. 이원수도 아내의 덕망에 눌렸으며 학문의 열등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에 처첩을 거느린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날마다 옷을 차려입고 나들이를 한다. 해질 무렵에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지 않는다. 연유를 물으면 매번 어느 기관장 또는 누구누구 등 명사들과 함께 식사했다고 한다. 이러기를 여러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 많은 명사들 중에 찾아오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정실부인이 소실에게 말하기를 내 오늘 남편의 뒤를 밟아보려고 한다면서 집을 나서 남편을 미행했다. 그랬더니 그는 성내에 들어서도 인사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곧장 걸음을 재촉하여 공동묘지를 가고 있지 않는가. 거기에는 언제나 장사 지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는 많은 음식이 남아서 누구라도 먹을 수 있다. 남편은 남겨져 버린 음식을 얻어먹고 배를 채운다. 저녁때가 되면 이마에 기름이 나돌고 거나한 주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부인은 크게 실망하고 집에 와서 소실부인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이 사람아 우리는 태산같이 믿고 사는 남편의 처신이 이와 같다고 한탄하고 있는 사이에 남편은 그날도 호기롭게 돌아와서 읍내의 유지인사들과 함께 식사했다고 허세를 부렸다.

맹자(孟子)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한 일을 처첩과 가족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였다. 세상에 남자들이 떳떳이 살고 싶어도 허영에 날뛰는 아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해야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직장에서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손바닥을 비벼야했고 때로는 남몰래 뇌물도 주어야 하며 안 해도 될 아첨인들 어이없겠는가.

요즘 생긴 말 중에 직장인이 출근할 때는 쓸개를 빼서 막고리에 걸어놓고 업무를 처리하며 퇴근한 연후에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고 한다.

옛날의 삼김(三金)시대(영삼, 대중, 종필)의 김종필의 명담이 생각난다. “손바닥을 비벼도 손금은 남는다자고로 공직자나 정치인이 손바닥 안비비고 출세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날 중국의 당()나라의 대문장가 한퇴지(韓退之)는 스승에 대한 학설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 중에 마음에 닿는 글을 골라서 옮겨 적어본다.

옛날에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스승이 있으니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업을 가르쳐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의혹이 없겠는가. 의혹이 있으면서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는다면 의혹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도를 깨침이 나보다 먼저라면 나는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요 나보다 뒤에 태어났더라도 도를 얻음이 나보다 먼저라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으니 나이가 나보다 많고 적은 것을 따지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분의 귀천도 없으며 나이의 장소(長少)도 없고 오직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너무나 절실한 말씀이다.

우리는 역사를 들추어 볼 때 충신, 열사, 효자, 학자, 청백리(忠臣, 烈士, 孝子, 學者, 淸白吏) 등 훌륭한 스승님들이 그렇게도 많았는데 오늘날은 오히려 사도부재(師道不在)의 세상으로 바뀌어 사회 풍조는 문란하고 학교의 교풍도 말이 못된 형편이다.

교사는 교감 교장을 두려워하고 학생은 선생을 존경하고 장내의 문제를 의론하는 큰 스승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어떤가. 교감 교장은 교사를 조심하고 교사는 학생의 눈치를 살피는 세상이 되었다.

물질만능의 문명이 전통의 생활윤리를 짓밟아 버렸으며 역사 속의 스승을 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의 스승의 도는 곧 인간의 도요 충효의 도라는 것을 깨달아야 세상이 바로 설 것이다.

이 글 중에 언급한 우리나라의 사임당, 중국의 성인 맹자, 당나라의 문장가 한퇴지는 모두들 우리 역사 속의 스승들이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교언영색이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하였다.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는 사람은 어진 사람이 드물다 하였다.

요즘 대선(大選)판국은 말작란으로 시작하고 말작란으로 끝날 것 같다. 진중하고 무게있고 실천력 있는 지도자가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