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햇살이 서리를 녹이고, 지고 남은 나뭇잎이 힘없이 떨어진다.
늦가을은 서북에서 불어오는 소삽(疏澁)한 바람 소리로 시작되고 얼치기 햇늙은이는 이유없는 외로움으로 시름에 쌓인다. 고목 귀퉁이의 의시진 구렁에 수북이 쌓인 빛바랜 낙엽이 한줄기 바람을 타고 우르르 쓸려간다. 언젠간 알 수 없는 그날에 우리 모두들 낙엽처럼 지고 만다는 우수(憂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있다.
밝은 햇살을 등에 지고 버스럭버스럭 낙엽을 밟으며 떠나는 가을의 정취에 젖어 주위의 오솔길을 산책한다. 생각이 시원하다. 잎 다 내린 가을산은 묵은 때가 덕지덕지 깔린 마음을 조촐하게 씻어준다. 몸에 붙은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든 나무들이 스산한 바람에 가늘게 흔들린다.
경쾌한 문장이 유려(流麗)하여 송(宋)나라에까지 알려지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늦가을의 산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山形秋更好(산형추경호) 산의 형용은 가을 들어 더욱 아름답고
江色夜猶明(강색야유명) 강물의 빛은 밤이 되니 오히려 밝아라
산의 아름다움이 어찌 가을에 그치겠는가?
연록이 뒤덮어 생기를 불어넣고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한 가지 사이를 이름 모를 산새들이 분별없이 사랑을 나누는 이른 봄도 좋다. 녹음이 짙게 드리워 작열한 태양을 가리고 앞도 뒤도 푸르름만 싱그러운 여름산에 산림욕을 즐기는 남녀들이 긴 숨을 몰아쉴 때도 좋다. 눈 덮인 겨울날의 하얀산에 낙낙장송은 만리풍 몰아쳐도 의연하고 장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니 그도 역시 운치가 있다.
“근심을 피하려고 높은 산에 올랐더니 근심도 날따라 이 산에 올랐구려” 중국 고사의 한 토막이다.
작은 이익에도 눈을 밝히고 자기만족만 밝히려는 사람이 어찌 나 한사람 뿐이랴마는 이래저래 헷갈리는 마음을 바로잡고자 가을 산을 밟으면서 오늘은 산과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했지만, 그도 역시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멋있는 사람의 소유물이다. 여유 시간을 여유롭게 활용할 줄 모르는 옹졸한 사람들이야 시각으로 뒤바뀌는 생각을 가늠하지 못하니 말이다.
마음을 비웠다고 자처하는 어느 도사가 표주박을 옆구리에 차고 허허로운 산길을 걸으면서 갈증을 느꼈으며 양지바른 언덕 아래 감로수(甘露水)를 발견하였다. 차고 있던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시고 세간을 굽어살핀 후에 혼자서 중얼거렸다, “중생들아 가진것 모두를 버려라, 이 표주박 하나면 족한 것”을 하고 득의 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친 바 없이 열 손가락을 펴든 동자(童子)가 나타나더니 도사의 표주박을 물끄러미 보면서 감로수를 움큼으로 마신다. “도사는 아직도 버릴 것이 많소, 몸에 걸친 옷은 거추장스럽고 표주박은 또 무엇에 쓰려하오” 일진청풍(一陣淸風)에 동자는 사라졌고 사방을 둘러보니 적막뿐이다. 그제서야 자신이 득도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면서 깊은 절간에서 수양을 쌓았다고 한다.
각설하고 오늘은 겨울철 첫 절기 입동(立冬)이다. 이때를 두고 한래서왕(寒來暑往)하고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 한다. 이제 거둠과 갈무리가 거의 끝나고 농한기에 접어든다.
이 사람은 언제나 시간은 남아돈다. 며칠 전에 같은 향중에 거주하는 전직장관 L씨 부처와 안동출신 명사(名士) L학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지라 안동의 속초해물탕집에서 만나 수인사를 하고 모두들 유창한 달변이라 구김살 없고 꾸민새 없는 대화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냈다. 푸짐한 해물탕으로 오찬이 끝나고 만추(晩秋)의 강산 정취를 음미하고자 안동댐 언저리의 연못 주변을 산책코스로 잡았으며, 적당한 공간에 차를 세웠다. 때마침 일요일이요 날씨도 쾌청하다.
문득 왕희지(王羲之)의 나정기(蘭亨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시일야 천랑기청하고 혜풍화창이라(是日也 天朗氣晴 惠風和暢) 이날따라 천기는 맑고 온화한 바람은 화창하였다.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 쳐다보고 삼라만상의 성함을 굽어살핀다. 눈을 사방으로 돌리고 회포를 멋대로 달려 눈과 귀의 즐거움을 지극히 할 수 있어 참으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입구에 아담한 연못이 위와 아래로 나뉘어 저 있으며 철이 지나 연꽃은 없으나 환경에 알맞은 분수가 설치되어 맑은 물을 뿜으니 마음을 씻기에 적당하다. 모두들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듯 30대 전후의 남녀들이 어린이를 앞세우고 혹은 앞뒤에 주머니를 짊어지고 캥거루처럼 어린이를 담고 마냥 즐거운 나들이를 하고 있다. 혹자들은 경쾌하게 즐기고 혹자들은 지는 잎이 아쉬운 듯 사색에 잠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 일행은 왕고내금(往古來今)의 한담(閑談)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정상의 안동루(安東樓)를 향해 느린 걸음으로 오르지만 나에게는 힘겨운 여정이다. 마침 L씨가 적당한 길이의 지팡이를 장만하여 나에게 들려주어 그것에 의지하니 적게라도 보탬이 되었다. 도중의 적당한 공간에 목책 휴식처가 있는지라 일행이 둘러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맛 좋은 도너츠 빵과 향이 짙은 생강차를 곁들어 입을 위로하고 지고 남은 자주색 단풍잎을 살폈다. 언젠가 흩뿌리는 빗발에 모두들 지고 말 것이다. 문득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가 머리에 떠오른다.
“추풍기혜 백운비(秋風起兮 白雲飛)하고 초목황락혜 안남귀(草木黃落兮 鴈南歸)로다. 가을바람 일고 흰구름 날며 초목은 누렇게 시들고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도다.” 여기서 생략한다.
손에 잡힐 듯한 안동루이지만 시름겹게 올랐다. 가림없는 삼간 누각에 안동루의 현판이 아담하게 걸려 있다. 하지만 사실을 밝히는 기문(記文) 한편과 시판 하나쯤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없으니 약간은 아쉽다.
기문이란 것은 건물의 역사를 기록하는 하나의 서술문이요, 누각의 구색이며 후일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아! 허허로운 누각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옹졸한 생각을 한시로 적어 한 수를 붙이지만 불성 모양이다.
辛丑立冬節與諸益登安東樓 신축년 입동절에 여러벗들과 함께 안동루에 오르다
淸淨湖畔緩逕斜 맑디맑은 호수가 산비탈 길 완만한데
滿地落葉無人掃 지는 잎 땅에 가득하나 쓰는 사람없네
安東虛樓秋已晩 허허롭다 안동루 가을도 저무려나
霜楓艶於躑躅花 서리 맞은 단풍잎 진달래꽃 보다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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