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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은 죽음 앞에 떳떳 하였다

의성신문 2021. 5. 7. 09:17

한말의 친일 개화 내각의 수령으로 활동한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된 이듬해인 18962월이니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 아침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로파(親露派)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내각총리대신에서 실각 되고 역적의 괴수로서 체포령이 내려졌다. 경무청으로 끌러가던 그는 광화문 거리에서 성난 군중들에게 덜미를 잡힌 채 몽둥이로 타살되고 말았다.

을미사변의 직후라 흥분한 군중들은 그의 시체에 밧줄을 걸어 개 끌듯이 끌어서 종로로 옮겨갔다. 그리고 주먹질 발길질 팔매질의 남발 속에 어느 군인이 칼로 그의 남근(男根)을 잘라 내면서 소리쳤다. 이런 역적은 씨를 남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광경을 심하다고 한 사람은 역적으로 몰리는 판국이 되었다.

당시는 국모(國母)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된 한을 안고 있던 민감한 시기라, 군중들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이렇게 죽이고도 오히려 분이 덜 풀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라의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지 16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청일(淸日)전쟁의 승리로 대궐을 점령한 일본군의 후광을 업고 갑오(甲午)개혁을 수행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이 이루어지고 총리대신으로 재임할 때 일본의 권고에 따라 단발령을 실행하였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영위지하무두귀(寧爲地下無頭鬼) 불작인간단발인(不作人間斷髮人)이라 차라리 지하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인간 세상에 상투 자른 사람은 되지 않겠다.”하고 상투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겼다.

지금 한 세기가 흘러가고 개화된 세상에도 지리산 청학동에는 아직도 상투를 이고 다닌 사람이 있다고 하며, 혹자 사람들은 그들을 고상하게 보기도 한다. 당시의 사회통념은 단발령 시행의 한가지 죄과만으로도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마치면서도 대의를 버리고 생명을 구걸하지 않는 떳떳한 사람이었다.

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 일본인 군대가 달려와서 위기를 구해 내려고 했다. 김홍집은 정중하게 소리쳐 말했다. “한 나라의 총리대신으로 동족의 뭇매에 죽는 것은 시운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요, 남의 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구차하게 살아남고 싶지는 않소하고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몽둥이가 기다리는 동족을 향해 걸어 갔던 것이다.

그의 최후가 이렇게도 숙연(肅然)하였거늘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다만 나라의 오래된 구태를 벗어 버리고 부강의 길로 가기 위한 개화의 선구자였다. 그가 일신의 영달을 탐하는 친일파이었다면, 일본에 붙어서 신변의 안전을 취하였겠지만, 그것을 버리고 동족에게 맞아 죽는 길을 선택할 만큼 나라를 사랑했고,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개화를 촉진 시키고자 하는 일념이었다.

반면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야 말로 원래 친일파가 아니었다. 친로파 정객의 한사람으로 아관파천을 주동하였으나 일본에 붙어서 이등박문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이 되고 나라를 팔아먹고 백작 후작의 승급으로 천수를 누리고 종말에는 매국노라는 천추에 씻지 못할 오명을 남겼다.

우리 사회에는 초심(初心)보다 만절(晩節) 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판단의 오류로 시행의 착오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만절은 모든 착오와 과실 불미와 불선을 묻어 버리는 역할을 한다. 선인들이 말씀하신 유방백세(遺芳百世)와 유취만년(遺臭萬年)의 갈림길이 곧 만절인 것이다. 절자는 마디 절() 자이다. 녹죽군자절(綠竹君子節)이란 말이 있다. 다른 나무는 마디가 없다. 유독 대나무는 마디가 뚜렷한 특징이 있다.

각설하고 김홍집의 일생 이력을 인명대사전에서 발췌하여 적어본다.

그는 조선조의 정치가로서 초명은 굉집(宏集)이며, 자는 경능(敬能)이고, 호는 도원(道園) 관향은 경주요, 참판 영작(永爵)의 아들이다. 1868년 고종 무진에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광양(光陽) 현감으로 출사하고, 1880년 예조참의로 재직할 당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소개하여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예조참판에 승진하였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척사운동(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개화정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다.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 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에 부딛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 한영, 한독 등 수호조약 체결의 부사(副使)로 제물포조약 체결의 부관(副官)으로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의 지위에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하고, 판중추부사로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고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의 우위가 인정되어 그들의 강요에 의하여 친일 내각이 다시 조직되었다.

이때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甲午更張)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국가재정은 어렵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 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박정양 내각은 구미 열강의 친근세력으로 기울어지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내각으로 개편하였으며 단발령의 방창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그들의 규탄을 받았다. 이때에 아관파천으로 친로파 내각이 조직되자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전기한 바와 같이 광화문 거리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개화사상을 평가하여 충헌(忠獻)공의 시호를 내렸다.

전고대방(典故大方)의 상신록(相臣錄) 기록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365명의 정승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중에는 기국과 재능과 문장이 뛰어나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의 업적을 남기신 분도 있으려니와 혹은 소인으로 혹은 간신으로 혹은 변절자로 역사에 먹칠한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