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611호-위대한 女性科學者, 마리 퀴리

의성신문 2017. 7. 10. 10:37



위대한 女性科學者, 마리 퀴리


1934년 7월 4일, 이 날은 위대한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녀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Poland)의 수도 바르샤바(Warzawa)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농촌의 하류층 귀족집안에서 1남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냈다.

그런데, 이 무렵은 폴란드가 러시아(Russia)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여서 폴란드인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다. 학교에서는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가 겪었던 35년간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떠올리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 때, 폴란드에서는 여자는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폴란드를 떠나 파리(Paris)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녀가 선택한 대학은 소르본(Sorbonne)이었다. 1891년, 그녀는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물리ㆍ화학ㆍ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힘이 들었다. 그러나, 행복했다.

행복이란 별 것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자기가 좋아하는 물리ㆍ화학ㆍ수학을 공부하면서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고가는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웠다. 특히, 그녀는 J. H. 푸앵카레(Poincare) 교수의 수학과 G. 리프만(Lippmann) 교수의 물리학 강의에 매료되었다. 한 켤레 밖에 없는 신발을 싣고 걸어도 언제나 즐거웠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 1893년에는 물리학 학사 시험을 수석으로, 그 이듬 해에는 수학 학사 시험을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이제 과학을 어떻게 공부해나가야 할까’로 고민했다.

그런데, 1895년 7월 마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녀는 소르본대학에서 평생의 반려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로써 폴란드 이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Marie Sklodowska)가 ‘마리 퀴리’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적(國籍)도 프랑스로 바뀌었다.

피에르 퀴리는 소르본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장래가 총망되는 과학도로서, 그 때 이미 그의 형 자크 퀴리(Paul-Jacque Curie)와 공동으로 ‘피에조 전기효과’(Piezoelectric Effect)를 발견한 바 있었다. 그 후, 형 자크는 몽펠리에(Montpellier)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피에르는 파리의 물리화학학교의 실험주임이 되었다.

한편, 이 무렵 마리도 물리 ‧ 화학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 두 사람은 결혼한 후부터는 그들의 관심분야인 방사능(放射能)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공동연구의 결과, 1898년 7월에 강력한 방사성 원소의 하나인 폴로늄(polonium)을 발견한 데 이어 12월에는 우라늄 광석에서 라듐(radium)을 발견하였다.

 

라듐 分離에 성공하다

 

마리와 피에르의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은 방사성(放射能) 원소에 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마리와 피에르는 방사능의 힘을 실험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였다. 그들은 동물을 대상으로 라듐의 반응을 연구한 결과, 라듐이 질병의 병세포를 파괴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마리는 “방사능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소르본대학으로부터 이학박사(理學博士) 학위를 받았다. 이 때가 1903년 6월이었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험난한 길에서도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나,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사람은 순탄한 길에서도 나아가지 못한다.”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 겸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 1795~1881)이 남긴 명언이다. 마리의 방사능 물질에 관한 연구를 두고 한 말인 듯 싶다.

1903년 12월, 마리와 피에르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 부부가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Antonie Henri Becquerel)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마리와 피에르에게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마리와 피에르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에게는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피에르에게는 1904년 소르본대학 교수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로써 더 이상 낡은 창고에서 실험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1906년 4월 19일,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였다. 마리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 피에르! 당신이 죽다니.” 그러나, 마리는 어린 두 딸을 위해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1906년 5월, 소르본대학에서 남편 피에르의 후임으로 마리를 물리학과 교수로 채용해주었다. 이로써 마리는 이 대학의 최초의 여성교수가 되었다. 마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피에르의 묘지(墓地)를 찾았다. ‘피에르의 명성(名聲)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마리에게 피에르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마리, 당신은 잘 할 것이오!’라는 피에르의 다정한 목소리기 들려오는 듯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리는 남편 피에르의 몫까지 더 열심히 방사성 물질 연구에 몰두했다. 때로는 강의실에서, 또 때로는 실험실에서 온힘을 쏟았다.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 측정에 성공하였으며, 1911년에는 폴로늄 및 라듐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화합물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는 위대한 여성과학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마리는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팡테옹(Pantheon)에 묘지가 마련되었다. 그녀가 사망한 지 61년만인 1995년 4월 20일이었다. 그런데, 이 곳 팡데옹은 프랑스를 빛낸 인물들이 묻힐 수 국립묘지로서,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 : 1694~1778)와 루소(Rousseau, J. J. : 1772~1778), 소설가 겸 극작가 위고(Hugo, V. : 1802~1885),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 : 1840~1902) 등이 묻혀 있는 곳이다.


팡데옹에 잠들어 있는 위대한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