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의 氣魄, 6ㆍ10萬歲運動
1926년 6월 10일, 이 날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순종(純宗, 재위 : 1907~1910)의 인산일(因山日)이었다.
4월 26일, 순종황제(純宗皇帝)의 붕어(崩御)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시내의 모든 상가(商街)가 철시(撤市)하고, 학교도 일제히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돈화문(敦化門) 앞에는 호곡(號哭)하는 민중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마지막 황제를 잃은 민중들의 슬픔이 오죽 했겠는가.
그 동안 일제(日帝)의 식민통치하(植民統治下)에서 탄압받고 지내야했던 민중들이 하나 둘 돈화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일제의 토지수탈(土地收奪)에 의하여 내 논과 내 밭을 모두 그들에게 바치지 않았던가. 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미명하에 경제적인 수탈은 또 어떠하였던가. 일시동인(一視同人)이니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허울 속에 우리의 가슴 속은 나날이 타들어갔다. 어디 그 뿐인가. 매일 매일 경찰의 총칼 앞에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야 했던 민중들은 그 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들은 목놓아 울었다. 순종황제의 붕어는 우리 민중들로 하여금 거대한 힘으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창덕궁(昌德宮)에서 치러지는 성복제(成服祭)에 참석하는 사이또오 마코토(齊藤 實) 총독(總督)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4월 28일, 송학선(宋學先)이라는 젊은이가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문(弔問)을 마치고 나오는 자동차에 탄 사람을 사이또오 총독으로 착각하고 칼을 휘둘러 죽음에 이루게 했지만, 죽은 사람은 다른 일본인 고급관리였다. 이를 ‘금호문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총독부(總督府)에서는 완전무장한 경찰들로 하여금 경계토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 5시 이후에는 돈화문 앞에서의 망곡(望哭)을 금지하였다. 이 사건이 6ㆍ10만세운동(萬歲運動)을 촉발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맞게 되자 일제는 천도교(天道敎) 등 종교단체를 비롯하여 의심가는 각종 사회단체를 수색하고,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통하여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을 투옥시켰다. 인산일이 가까워오자 분위기는 초조ㆍ긴장ㆍ절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뜻 있는 젊은 청년과 학생들은 인산일에 많은 민중들이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만세운동(萬歲運動)을 체계적으로 진행해나갔다. 또, 3ㆍ1운동 이후 민족주의(民族主義) 계열이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로부터 사상적(思想的)인 도전에 직면함으로써 민족정신(民族精神)에 위기감을 맞고 있었는데, 순종황제의 붕어를 계기로 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불을 당기는 새로운 기운이 크게 일었다.
純宗皇帝의 因山日에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의 붕어를 계기로 억눌려있던 반일감정(反日感情)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에 각급학교 학생들은 검은 완장(腕章)을 달고 애도(哀悼)의 예(禮)를 올리는 한편, 6월 10일 인산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장 선 학생단체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고려조선공산당이었다. 특히, 고려조선공산당은 권오설(權五卨)을 총책임자로 하여 「6ㆍ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태극기(太極旗)와 격문(檄文)을 만들었다. 이와는 별도로 중동고등보통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6월 10일, 이들 학생들은 순종황제의 인산행렬(因山行列)이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로(鐘路) 3가 단성사(團成社) 앞을 지날 무렵 운집한 민중들 사이로 뛰어나와 격문을 뿌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를 뒤따른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 제국주의(帝國主義) 타도!’,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를 외쳤다. 이 때,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2만4,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민중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 날,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는데, 인천ㆍ개성ㆍ평양ㆍ원산ㆍ정주ㆍ대구ㆍ공주ㆍ홍성ㆍ고창ㆍ순창ㆍ마산ㆍ통영ㆍ하동 등지에서 많은 호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에 당황한 일제(日帝)는 1919년의 3ㆍ1운동과 같은 전국적(全國的)인 만세시위(萬歲示威)로 확산될 것을 염려하여 철저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는데, 그들은 조선주차군사령부의 5,000여명의 군대(軍隊)를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부산과 인천에는 함대(艦隊)를 정박시켜놓고 만약에 대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천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ㆍ투옥되었으며, 이 들 중 연희전문학교의 이병립(李炳立)ㆍ박하균(朴河均),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李天鎭), 중앙기독교 청년회 학관 박두종(朴斗鍾), 중동고보의 곽재형(郭載炯)ㆍ황정환(黃廷煥)ㆍ김재문(金載文),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ㆍ이동환(李東煥)ㆍ박용규(朴龍圭)ㆍ류면희(柳冕熙) 등이 재판에 넘겨졌다.
11월 3일, 재판에 넘겨진 이들 주모자급 학생들에 대한 1차 공판이 개정되었는데, 이들은 참으로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순종황제가 승하한 후 조선학생회관(朝鮮學生會館)에 모여 인산일을 기하여 거사할 것을 의논하고, 격문 1만여장을 인쇄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재판장이 “대한독립 만세를 무슨 목적으로 불렀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세 살된 아이도 다 아는 일이니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다”고 답변함으로써 일본인 재판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또, 고려조선공산당 권오설도 6월 7일에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으며, 이준태(李準泰)도 같은 혐의로 검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의 관계는 고려공산당 청년회의 맴버로서 6ㆍ10만세운동에 깊숙하게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들 외에도 송진우(宋鎭禹) ‧ 정인보(鄭寅普)도 6ㆍ10만세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종로경찰서에 불려가서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6ㆍ10만세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젊은 학생들의 애국(愛國)의 열기는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애국정신이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그리고, 6ㆍ10만세운동은 그 준비과정에서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협력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는 민족계몽운동(民族啓蒙運動)을 이끌어간 신간회(新幹會)의 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역사적(歷史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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