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재미있고 차후 기억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이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저의 이름은 안oo입니다. 저는 안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성으로 맨 처음 들어와 윗대까지 살았던 마을은 안정리입니다. 조선 성종 때 판돈령부사였던 안중선(安仲善) 공이 이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난 뒤로 안정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본적이 안정이 된 것이 그러한 까닭입니다. 이후 안계초등학교, 안계중학교, 안계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교 협력 대학이 안동대학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안면사무소, 신평면 안사출장소, 안계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의성군청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죠. 저의 이모가 살던 곳이 안평면이었으니 안 자와 매우 관련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안계면 소재지였습니다.
알다시피 안계면의 소재지인 용기리에는 행정리가 7개나 있다. 군청 소재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의성군의 서부 지역에서는 제법 큰 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옛날에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누리던 누와 정자가 단 한 곳에도 없다. 요즘 말로 1도 없다. 왜 그럴까?
그나마 위양리 위천 절벽 위에 위천정이 있으나, 1930년에 건립한 것으로 그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너른 들이 바로 앞에 있으면서도 부유한 사람이 없었던 데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안계역과 안계원이 있던 옛날의 안계는 오늘날의 시안리에 해당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키를 뒤집어놓은 형상의 풍수에 의한 것일까?
안계평야에 기대어 살던 농민들의 고단했던 삶
1928년 8월 말 중외일보에 ‘의성지역 한해 구제대책으로 제방 축조계획을 수립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위천의 물길로부터 안계평야를 보호하는 9.9km에 이르는 제방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 - 제방은 일제강점기 말엽 전쟁 중에 식량 생산을 늘릴 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6·25 이후에야 완성한 것이다. 들에는 대제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면적만도 60여 ha에 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숙종 46년(1720) 삼남양전시(三南量田時)에 기록된 상주목 경자개량전안(尙州牧 庚子改量田案)에 의하면 단북면(丹北面)의 기주수(起主數)는 1,174명 - 단동면 양안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기주 86 - 이다. 위천 강가(江邊)에 있어 강물의 범람으로 인한 침수 위험이 상존하였다. 1745년 6월과 8월의 홍수 때는 침수되어 피해를 받지 않은 전답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침수된 곳에는 모래와 찌꺼기들이 쌓여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벌거숭이 땅이 되었다.
단북면의 경우, 양안 상(量案上) 총 전결 수는 622결 80부 7속이며, 그중 오래 묵혀 거칠어진 밭(陳田)은 94결 96부 2속이었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15.2%에 달했다. 토지 등급(土地等級)에 있어서도 1등 전답(田畓)이 없으며, 4등의 전답(田畓)이 각각 실전(實田)·실답(實畓)의 약 70%를 점하고 있었다.
예우직 또는 하급 관료가 대부분인 양반층 기주 268명이 156결 48부 9속의 토지를 소유하여 민유지의 21.9%를 점유하는 등 토지 양극화를 보여주고 있다. 양반의 경우 타 면 지역에도 토지가 더 있었을 것이다. 일본 내 부족한 식량을 한국에서 조달하면서부터 농민들은 만주에서 수입한 잡곡(조, 수수, 콩)으로 배고픔을 달래야만 하였다.
개화기 때에 세금을 은화로 내게 하면서 청송 심 부자의 전답을 처리할 당시, 안계에 있는 돈이란 돈을 모두 거둬들일 정도였다고 하며, 그 행렬이 1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병자사화(丙子士禍)’ 다음 해 사화에 참여한 권저(權著)의 의성(義城) 전지 모두 청성위 옹주(靑城尉翁主)에게 내려 주었다는 기사로 볼 때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성지역의 역둔토[驛屯土]는 2,042,834평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역둔토는 특별 처분령으로 전답은 10년 한, 대지는 3년 한으로 민간에 불하하고 대부료를 납부하게 하였으나 그림일 뿐이었다. 일본인 소유의 전답들도 많았다. 농민들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리조합비 부담도 커 소작농이 1917년 21.4%에서 1920년 27%, 1929년 45.6%, 1942년 53.8%로 점차 늘어났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공황의 파급, 1930년대 유례없는 일본의 대풍작으로 쌀 수출이 중단되자, 가격하락과 이윤의 감소를 만회하고자 안계 동양척식주식회사관리소와 일본인 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게 된다. 현재의 안계면 토매리 양지아파트 부근에 위치하던 안계 동양척식주식회사관리소는 논밭을 빌린 대가로서 해마다 내는 벼[賭租]의 소작 요율을 석 당 3승[升]까지 강요하는 등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였으며, 곡물 대신 금전으로 내게 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화전민 정리사업에도 불구하고 1929년 1.1%에 불과하던 화전민이 1932년 2.7%로 늘어났다.
너른 들판에 살면서도 생활은 비참했다. 한해와 우박으로 보리가 썩고, 홍수 때면 큰물이 황폐한 산의 토사를 운반하여 구천과 안계, 단북, 단밀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농토를 덮고 하상을 메우니, 1927년도와 1936년 이 땅을 버리고 풍토가 다른 남만주와 길림성으로 눈물을 뿌리며 집단이민하기도 하였다. 1936년 4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사 기사에 단밀면 이재민 50명을 태운 이민 열차가 만주로 향했으며 비안, 안계, 단북면 지역의 생활이 어려운 100여 명이 조상님 묘 앞에서 고별의 눈물을 흘렸는데, 이들은 봄이 찾아온 고향을 등지고 대구역에서 풍토가 다른 남만주 벌판으로 갔다고 한다.
소마저도 힘들어하던 안계평야에서의 벼농사
이리오면 안곗벌 오리, 저리오면 안계벌 시오리
황새 몇 마리 날아와 한 발로 서서 잠드는 날이면, 산등성이서부터 하늘이 맑아진데이
그걸 못 참아 강이 물깊이 파래지면 볏잎도 우쭐우쭐 초록빛을 쏟아내고
…
1993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안계 출신의 하종오 시인의 ‘안계들판 황새’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70, 80년대 추수가 끝난 겨울철 안계 들판 하늘은 두루미들이 V형 편대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너른 들을 묘사하였다. 남북으로는 오리, 동서로는 시오리.
안계 넓은 들판에서는 암소로 농사를 감내하기 어려워서 황소가 많이 사육되었다. 일제강점기 안계 우시장은 조선총독부 지정 종모우[種牡牛]시장으로 매매를 알선하는 전속 중개사가 70여 명이 넘었다. 이곳 종모우는 이북지방에까지 의성우[義城牛]라는 이름으로 공급되었다 하니 6~7리 길을 걸어서 소를 팔러 나오고, 수십 마리의 소를 사서는 서울까지 몇 날 며칠을 열을 지어 몰고 가던 광경들은 서부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으리라.
모내기가 끝난 7월 성수기, 하루장에 나오는 소가 1,200여 두가 넘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시장이었다. 그러니 소노래[牛歌]도 있을 터. 1925년 "개벽"에 소개된 우보[牛譜]에 의하면 강원도 지방에는 논밭을 갈며 "경전구[耕田謳]"를 노래같이 불렀으며, 함흥 등지에는 멍애가[駕牛歌]가 유행하였다. 의성에는 다음과 같은 원우가[怨牛歌]가 있었다.
육산포림걸주시절[肉山脯林桀紂時節]에 무지[無知]한아 인생[人生]들아 심상[尋常]이나 안이보고 세겹들인 색기 줄에 목을 얼거 길게 매고 나무 휘여 코를 뀌고 멍애 장기 흙 장기는 걸고 미고 끌면 백무전[百畝田]을 갈어가면 엇지한번 실족[失足]하니 독[毒]한 채와 모진발길 한두뼈를 눌너 찬다 눈을 감고 업퍼지니 내 처소[處所]에 몰아다가 구원[救援]이나 하는 것이 소복[蘇復]이나 하는 것이 인정간[人情間]에 항사[恒事]어던 일구난설[一口難設] 바이업서 급히 불러 도우단[屠牛坦]을 생소머리 독기걸어 두피족[頭皮足]을 각각〔各各〕내니 천자이하[天子以下] 대신총신[大臣寵臣] 내 고기로 다자시고 억조창생[億兆蒼生] 만민[萬民]들은 내 고기로 호구[糊口]하고 각 읍 수령병감사[各邑守令兵監司]는 내 고기로 실케먹고 내지여 익는 곡식무지[穀食無知]한 개닭들은 알을 빼서 주건만은 요내 나는 껍지주네.
어찌 소들만 힘이 들었을까? 사람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입하(立夏 ; 양력 5월 5~6일경, 24절기의 하나로 여름의 시작)와 소만(小滿:양력 5월 21일경,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 절기에 맞춰 논에 볍씨를 뿌리고, 하지(夏至:양력 6월 21일경, 낮이 연중 가장 긴 시기)에 모를 심는다. 벼농사를 짓기 가장 바쁠 때이다.
그럴 때 농민들은 ‘모노래’를 부른다. 모를 손에 쥐고 여기저기 꽂는 직설적 표현은 경북지방의 모내기 노래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모내기 노래의 소재는 대체로 ‘모’와 여인들의 ‘거게’로 되어있다. 남자들의 생식기를 모에 여자의 음부를 논에 비유하되 더욱 우습고 즐거운 마음을 자극하는 질펀한 육담에 의해 고된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하는 풍자를 하면서 고단함을 극복하곤 하였다.
하지만 소작에 의한 경작자가 많았던 안계들의 상황은 민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의성지역 민요의 특색은 모를 주인마님의 ‘거게’에 꽂는 것이 아니라 ‘양반의 등’에 꽂는다. 양반이 하급관료 출신으로 이루어진 까닭일까? 풍자의 화살이 농민들에게 힘든 모심기를 시켜놓고 좋다는 문어며 전복 안주를 들고 첩의 집에 술 마시러 간 양반에 돌아가 있다.
…
여게 꼽고 저게 꼽고호 / 주인네 양반 등에 꼽세
암반 없이, 꽂이 나마 / 빈틈없이, 꽃어 주소
물꼬 청청, 헐어 놓고호 / 주인네 양반, 어데 갔노
문에 전복, 손에 들고호 / 첩의 방에 놀러 갔네
…
모심기를 끝낸 후에는 벼가 잘 자라도록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논매기를 한다. 이 시기는 한해 가운데 가장 덥다고 하는 삼복(初伏, 中伏, 末伏)이다. 엄청 고된 작업이나, 농민들은 운명쯤으로 받아들이며 불평 없이 일했다. 이때는 논맴(노세)요를 불렀다. 이때는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과는 달리 장마철 옷 적시는 것과 신발에 흙 묻히는 것들을 걱정하는 양반들의 행동을 규탄한다. 가시가 들어있는 풍자적인 웃음이다.
향토정서가 깃든 고향의 노래인 본 민요에는 반상의 구분이 엄연했던 사회체제에서 지배계층에 대하여 민요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불만을 터뜨려 절제된 웃음이나마 농민의 정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으로 민요를 통해 즐거움을 누렸던 것이었던 만치 풍자와 해학 속에 깃든 의미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웃음과 즐거움, 재미보다 씁쓰름한 느낌을 갖게 한다.
1) 《商山錄》坤, 乙丑 八月二十四日 牒報. “本州三十一面之內 外北·永順·大坪·內東·中東·中北·外東·長川·丹東·丹南·丹西·丹北等十二面段 渭洛兩江之邊也 若値水年 則輒有覆沒之患矣 至於今年 則自六月八月至大水連仍 所在田畓 長在漲溢之中 便作魚斃之所 殆無田形間 有完田完畓 而累巡沈沒之餘 流沙餔坐滓滿 疇田無禾穀 便若赤地是乎旀”.
2) 『조선왕조실록』 1457년(세조 3) 3월 23일(병술) 기사 참조.
3)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36년과 1942년 판 및 1935년 발간한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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