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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 의성 유일 국보(國寶) 의성탑리리오층석탑(금성면 오층석탑길 5-3)

의성신문 2022. 10. 7. 10:32

탑이 있는 마을. 그래서 탑리(塔里)’라고 하였다. 반대로 탑리에 있는 탑이라고 하여 의성탑리리오층석탑이라고 하였다. 마을과 석탑은 서로 나누려고 해도 나눌 수 없는 관계이다.

 

山雲塔 在金鶴山下俗傳召文國王時所建礱石築之凡五層精緻高大巋獨存少無傾側

산운탑은 금학산 아래에 있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조문국 당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돌을 깎아서 오 층의 탑을 쌓았다. 정밀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하여 높고 크게 쌓아, 마치 홀로 우뚝 서 있는 듯하다.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위 기록에 의하면 의성탑리리오층석탑이라 부르기 이전 이 탑의 이름은 산운탑이라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자족재 신봉석, 석당 김상정, 옥수 조면호 등이 노래할 적에는 조문탑(召文塔)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간에 전하는 말은 조문국 당시에 세운 탑이라는 것이다. 탑의 형상을 살피고, 얽혀 있는 이야기들도 알아보자.

각부의 석탑재가 지금까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 흙으로 높이 돋운 다음 그 위에 탑을 쌓았으므로, 그 모습이 조문국의 터전을 내려다보며, 하늘과 금성산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모양새다.

탑의 앞쪽에는 뭉그러져 잘 알아볼 수 없으나, 희미하게 탑 주변을 밝혀주던 석등(石燈)의 자취가 있다. 응회암[凝灰巖]으로 쌓아서 만든 5층 석탑의 높이는 9.6m, 기단의 폭은 4.51m이다. 중국의 전탑양식이 전래되었으나 벽돌을 구울 수 없었으므로 분황사 모전석탑은 흙벽돌 대신 돌을 깎아서 세웠다.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을 7세기 말에 세웠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낮은 단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초층 옥신의 우주 및 탱주의 상촉하관(上促下寬)의 엔타시스 수법을 사용하는 등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전탑(塼塔)의 조성 기법을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고찰

 

기단부(基壇部)14매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이루어졌는데, 판석(板石)으로 면석을 구성하였다. 면마다 있는 우주와 2()씩 있는 탱주는 모두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과 면석을 합한 석재는 24매이다. 우주와 탱주에는 좌우에 면석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돌출 턱이 있다. 건축 기단으로서의 면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갑석은 8매의 판석을 결구(結構)하여 덮었는데, 부연(副椽)은 표시되지 않았다. 갑석의 상면에는 1단의 괴임돌을 놓아 옥신을 받고 있다. 기단에는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 기둥과 모서리 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의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초층의 옥신은 각 면마다에 우주가 별석으로 세워졌고, 몸돌 남쪽의 한 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감실 내부 3면과 천정의 보이는 부분은 연마되어 있다.

감실 바깥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역한석(閾限石)의 양쪽 끝 가까운 곳 돌출된 부분이 목탑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감실 문비는 없어졌지만 양쪽 위아래에는 지도리 구멍이 파여져 있다.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우주에는 옛 양식에 따라 배흘림 양식이 발견된다. 주두(柱頭)에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이 큰 좌두(坐枓), 그 위에 액방(額枋행방(裄枋)이 이중으로 조각된 형태이다.

배흘림 양식(entasis)은 나무기둥을 높게 세웠을 때 위쪽이 넓어 보여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착시를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미리 좁게 하는 방법인데, 목조건물에 쓰이는 이러한 수법이 1층 옥신의 우주에도 적용된 것이다.

2층 이상의 옥신에는 면마다 우주 외에 중앙에 1()의 탱주가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과 1층 받침이 별석(別石)으로 되어있는 데 비해 4, 5층이 한 돌로 되어 있다. 일관된 결구 방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랫면은 5단이며, 윗면은 6단의 층단이 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추녀 부분에는 풍탁(風鐸, 풍경)을 매달았던 자리로 여겨지는 구멍이 보이기도 하는데,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좌로부터 풍탁공, 인장을 설치하기 위하여 낸 홈, 상륜부의 노반 근거리 모습

이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기단 구조와 옥개석 상하면에서 전탑의 양식을 볼 수 있고, 초층 옥신의 우주 및 탱주의 상촉하관(上促下寬)의 엔타시스 수법, 주두 위에 좌두, 추녀 전각부(轉角部)의 반전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 전탑의 조성 기법을 보여주는 등 석탑에 선행하여 목탑과 전탑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데 있어 유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신라 선덕왕 때에 당나라와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되면서 중국 전탑 양식이 전래하였으나, 벽돌을 구울 기술이 없었던 까닭에 신라의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은 흙벽돌 대신 안산암을 깎아서 세운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신라의 탑이 실험과정을 거치며 변천하는 가운데, 7세기 말 세워진 탑이 바로 탑리 오층석탑이다. 따라서 분황사의 석탑(국보 제30)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탑 앞에 서 얼핏 보면 모전 석탑으로 보이나, 실제 석재를 결구하여 쌓은 것이다. - 전탑계 양식을 모방하였으나 건조 재료로 보아 석탑이다. 이 탑은 넓고 큰 기단 위에다 5층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 받침이 5단인 점 그리고 기단이 광대한 것은 분황사 석탑과 통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분황사의 석탑과는 달리 독특한 것들이 있다. -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단이 잘 정비된 건축 기단의 모습과 같고 탑신에 우주 이외 주형(柱形) 1주를 만들었고, 사방에 설치하던 감실이 한 면에서만 보이는 점이다. 그리고 기단부의 우주나 탱주 그리고 탑신의 우주, 주신에 '엔타시스' 수범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의성탑리리오층석탑은 한국 석탑의 선구적인 특수한 탑으로 분류되는 탑이다.

 

석탑 건립의 배경, 조문국의 왕녀가 신라의 인통이 되다.

 

권상노의 역대지리연혁일람표에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나라()로 표기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탐라국(耽羅國),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 대가야국(大伽倻國), 소가야국(小伽倻國), 우산국(于山國) 11개 나라()들이 그렇다. 그중 조문국(召文國)도 있다.

후한서(後漢書) 한전에 마한은 서쪽, 진한은 동쪽, 변진은 진한의 남쪽이라고 위치를 구별하였으며, 양서(梁書)에는 신라의 전신이 진한임을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경상도는 본래 진한의 땅이었다고 한다. 조문국은 진한지역에 있던 삼한시대의 한 나라였다.

삼한시대의 출발은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다. 당시 초전리, 학미리, 산운리, 만천리 등지에 지석묘를 조성하며 살아왔을 토착민과 선진 문물을 지닌 유이민(流移民)이 주축이 되어 성읍국가(城邑國家) 조문국을 탄생시켰다.

삼국사기에 문소군은 본시 조문국’”이었다고 한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757(신라 경덕왕 16) 행정 명칭을 일제히 개정할 때까지는 군·현으로서의 지명이 없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 신라는 한동안 간접 지배의 형태를 취하였다. 185(벌휴이사금 2)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조문국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나, 신라의 인통(姻統)을 배출한 지역으로 군·현으로의 편제가 무의미할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여암전서에 의하면 어느 때에 신라에 속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도 하였다.

조문국 간층(干層)이 남긴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는 고총·고분이 있다. 신라 사회에서 특정 기간 핵심 지배층을 사후에 안장하기 위하여 조성된 배타적인 묘제 돌무지 덧널무덤 積石木槨墳이 변형된 유사 돌무지 덧널무덤 變形 積石木槨墳과 함께 사적 의성금성면고분군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최상위 지배층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신라의 중심 지구에만 등장하는 묘지 형태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곳 지배집단과 경주지역과의 특별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기철 시인의 석탑, 그대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보면 이 탑에 얽혀진 역사를 읽은 듯하다. 그는 이 탑을 여인에 비유하면서 먼 곳을 바라본다.’라고 하였다. 풍탁과 함께 흙이 쌓인 그 위에 높다란 석조 기단을 조성하여 탑을 쌓은 것이다. 층마다 옥계부, 네 귀퉁이에는 풍탁을 달기 위한 구멍이 있다. 위아래로 풍탁공이 뚫려 있는 것은 이 탑 이외에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많은 귀고리를 달고 있는 여인과 같다.

 

긴 세월, 몸매 고운 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천년을 기다려도

아직 기다림이 남았는지

그녀는 삼백예순의 낮과 밤을 누굴 기다려

오늘도 먼 곳을 바라본다.

옥이 부딪는 소리같이 낭랑한 목청

 

거대한 흙으로 쌓은 단 위에 탑을 조성하였다.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군데군데 둘레돌을 세워 둔 것이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과 유사하다. 토담 위에 석조 기단으로 된 것이 마치 여인이 받침대 위에 올라서 발돋움하고 있는 듯하다.

탑을 뜯어놓고 보면 사용된 석재의 크기나 결구 방식에 어떠한 규율이나 특이한 기법이 없다. 칼데라 화산 금성산에서 발견한 유문암질의 응회암을 레고처럼 하나하나 연결한 뒤 인장으로 고정한 것이다. 하지만 탑을 바라보면 단아하면서도 위풍이 당당하다. 화산재로 만들어진 응회암은 풍화되어 기다림에 지친 여인의 속내처럼 비어있다.

응회암이 풍화되어 이물질이 탈리되면서 생겨난 홈

군데군데 호석을 세우면서 흙으로 거대한 단을 쌓았다. 그 위에 석재의 기단이 있어 상, 하층 이중의 기단처럼 보이는 것이 여인이 발돋움하는 듯하다. 옥개부 모서리마다 풍탁공이 있다. 여인의 귀고리 같다. 시의 한 구절에서, 탑의 형상에서 여인을 느낄 수 있다.

화랑세기미추 대왕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의 인통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했다. 까닭에 세상에 이 계통을 진골정통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조문국의 왕녀인 운모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왕비를 배출하던 옥모의 후손들이 모국이었던 조문국을 잊지 못하고 세운 탑이 아닐까?

 

1) 權相老韓國地名沿革考, 東國文化社, 1961. 11. 25. 참조. 기록 외의 나라는 金官國, 押梁國, 沙伐國, 骨火國, 阿尸良國

2) 신경준의 여암전서(旅菴全書) 6 疆界考 : ‘조문국을 살펴보면 겨우 삼국사 한곳에 벌하였다 쓰여 있음에 불과하므로, 어느 때 신라에 속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按召文國 僅一見於三國史 不過書伐而已 未知何時屬于新羅也 或伐休時取之歟)’라고 하였다. 최성환과 김정호가 함께 엮은 여도비지(輿圖備志)와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志)는 조문국을 멸한 뒤 조문()을 두었다고 하였다.

3) 인통(姻統)은 왕비를 배출하는 계통으로 철저하게 모계에 의하여 전해졌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보도(保道)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인데 내숙공(乃宿公)의 딸이다. 선혜(善兮)의 어머니는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鳥生)의 어머니는 아노(阿老)이고, 아노의 어머니는 내류(內留)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光明)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모(紅帽)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옥모(玉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