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군(聞韶郡)에서 의성부(義城府)로
의성현(義城縣)은 본래 조문국(召文國)으로, 신라(新羅)가 차지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초에 승격시켜 의성부(義城府)가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안동부에〉 내속(來屬)하였다. 인종(仁宗) 21년(1143)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신종(神宗) 2년(1199)에 적에게 함락된 일이 있다고 하여, 감무(監務)로 강등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대구(大丘)에 병합되었다. 얼마 후 복구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덕왕 때 구화현(仇火縣)을 고구현(高丘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의성현(義城縣)에 합쳐서 소속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義城縣本召文國, 新羅取之, 景德王, 改爲聞韶郡. 高麗初, 陞爲義城府. 顯宗九年, 來屬. 仁宗二十一年, 置縣令. 神宗二年, 以嘗陷賊, 降爲監務. 忠烈王時, 倂于大丘. 尋復舊. 【三國史記云, “景德王, 改仇火縣, 爲高丘縣, 後合屬於縣”.】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위 기록에 의하면 지역의 군·현 이름은 조문국→(조문군)→문소군→의성부로 변천(變遷)되었다. 조문이라는 지명이 쇠(鐵) 또는 황금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나, 문소 또는 의성이라는 지명은 유교적 성향을 띠고 있다. 또한 여타 지명과는 달리 산천경개(山川景槪)와 자연물(自然物)에 따라 이름지어지 않았다.
문소(聞韶)라는 지명은 조문(召文)이라는 옛 지명의 앞뒤 순서를 바꾼 뒤에 ‘공자가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글자를 바꾼 것이다. 이후 의성으로 지명을 바꾸면서 의(義)가 뜻하는 ‘클’과 문(文)의 뜻 ‘글’이 음운상으로 유사하므로 의(義)를 취한 것이 아닌가? 옛 지명과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면서도 좋은 뜻을 가진 전혀 다른 지명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의성(義城)’이라는 지명은 ‘의(義)로운 사람들이 사는 고장(城)’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명 자체가 지역사회의 문화적 성격을 천명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지역민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겠다. 점필재 김종직이 극기 유호인을 의성의 현령으로 보내면서 쓴 송별 시에 그러한 느낌이 담겨 있다.
[送克己之任義城]의성으로 부임해 가는 극기를 보내다
侍講分符地 시강으로 부절 나눠 받아 간 지방은
川原僅一同 내와 들판이 겨우 사방 백 리이지만
人多洪術裔 사람은 홍술의 후예들이 많고
俗帶召文風 습속은 조문의 풍기를 띄었다
…
‘의성(義城)’으로 지명으로 지명을 바꾸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군현들의 명칭들은 대부분 그 고을의 역사적인 사건이라든지 인물의 활약상, 국가적인 기여도 등을 고려하여 이루어져 왔다. 대부분 ‘~ 에 대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와 ○를 ○으로 임명하고, ○을 ○으로 승격시켰다.’라는 식이었다. 의성의 경우 어느 시기, 어떤 공로를 세워 지명을 바꾸고, 부로 승격시켰는지 구체적으로 기술된 것이 없다.
『고려사(高麗史)』 929년(태조 4) 7월 기사에 의하면 ‘견훤이 정예 군사(甲卒) 5천 명으로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니 성주 장군 홍술(洪術)이 전사하였다. 태조가 통곡하면서 “나는 좌우의 손을 잃었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를 근거로 하여 일본인 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蘶)는 당시 의성부를 공략하고 있음과 다른 지방의 경우 동시기에 모두 옛 지명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증거로 들면서 홍술이 고려에 귀순 하는 시점에 이미 지명이 바뀌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귀순 시기가 제도를 정비할 시점이 아니다. 귀순하던 922년경에는 전쟁 중으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의성부가 설치된 이후의 관점으로 기록한 고려시대의 사서이기에 그의 설은 타당성이 부족하다.
『경상도지리지』 등 사서에서는 고려 태조 때 의성부로 고쳤다는 이야기만 전하여 올 뿐이다. 지명 변경 시점을 정확하게 밝혀둔 기사가 없다.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 편에 의하면 후삼국을 통일하고 안정된 940년(태조 23) 3월에 고려는 지방행정 단위(州府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가까운 이때 승격하였을 것이다. 지명 변경 및 승격과 관련하여 명시한 기록물은 없으나, 태조는 문소군 전투에서의 숭고한 의리를 지켜 순사(殉死)한 홍술을 기념하기 위하여 의성(義城)이란 지명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태조 때 새로이 편성한 10개의 부(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문소(聞韶)’라는 이름은 봉황의 전설과 유교 경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조선 후기 대표적 여항(閭巷)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의성(義城)에 대해 노래하기를 추로의 고장이라고 하였다. ‘문소(聞韶)’라는 좋은 지명을 두고 굳이 새로운 지명을 부여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韶州員幅福州聯 / 韶州 지역은 福州에 연하였고
鄒魯名邦自古傳 / 鄒魯의 이름난 지방이라 예부터 전한다네
…
개인에게도, 지역사회에도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름들이 불리게 되면서 한 개인이나 지역사회의 이미지가 은연중 결정되어 간다. 의성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뜻을 풀이할 경우 바르거나, 의로운 [義] 영역[城]을 의미한다. 또한 의성의 '의(義)' 자는 맹자의 4단(端 : 仁, 義, 禮, 智)의 하나로, 군의 지명으로 이들 4글자 중 하나의 글자를 택한 경우라 더욱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과연 홍술이 어떠한 공을 세웠기에 ‘의(義)’자가 들어간 새로운 지명을 부여받았을까? 아님 치소의 변경으로 인한 것일까? 홍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듯하다. 사후 그에 대한 지역민들의 예우 등을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소(治所)가 지금의 의성읍 지역으로 바뀐 것은 조문국의 국읍이었던 조문리 지역의 조문군이 문소군이 되고, 다시 의성부로 바뀌면서 피촌향(皮村鄕)으로 강등된 것으로 보인다. 치소의 변경은 지명과는 무관하다. 홍술의 순절과 관련되었다고 보겠다.
의성은 신라의 변방이자, 고구려에 인접한 까닭에 고려에 영합할 수 있었다. 지리적인 인접성이 고려 정권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기[爭覇期]에 오천[烏川] 홍술[洪術]이란 진보의 호족이 왕건에게 자진 귀순하게 되며, 문소성의 성주가 된다. 그 이후 일곱 해 뒤인 929년(태조 12, 신라 경순왕 3)에 고려와 신라의 연결통로를 완전하게 봉쇄하기 위한 최승우의 전략으로 군사적인 요충지에 있는 문소성은 후백제의 공격을 받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부정적 요인이 되었다.
의성은 소백산맥 남쪽 경주에서 영천, 의성, 안동, 영주로 북상하여 죽령(竹嶺)으로 연결되는 길과 영천, 안계, 상주, 문경을 거쳐 조령(鳥嶺)으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나누어지는 결절지(結節地)에 있었다. 또한 의성은 문경, 예천, 안동, 영주 일원을 연결하는 종적인 연결고리에 있었다.
진보현은 의성부에 속한 영현의 하나였다. 지명 그대로 수용할 경우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일대이다. 그러나 성황제영송신가(城隍祭迎送神歌)에서 홍술이 의성인이라고 하였다는 점과 홍술의 호가 오천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이동 수단과 거리 등을 감안하고『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직전 지명 칠파화현(漆巴火縣)의 변음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의성읍 철파리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해동지도 의성현과 지승[地乘]에 읍치 오른편에 오천 충렬사[烏川 忠烈祠]라 쓰고 또 드물게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홍유 개국 (김)홍술 대려 조사[洪儒 開國 金洪術 代麗祖死]라는 설명이다. 홍유는 개국공신이며, (김)홍술은 태조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홍술이 순절하였다는 황제봉 오천동은 현재의 의성여자중학교 뒤쪽 둔덕산에 해당한다. 정확하게는 사당골의 충렬사와 순절비가 있는 곳이다. 홍술의 순절로 인하여 의성이란 지명을 부여받고 부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1530년 간행한 유호인(兪好仁)의 뇌계집(㵢谿集)에 성황제영송신가(城隍祭迎送神歌)가 전하여 오는데 그중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참고로 그의 성과 관련하여서는 이견(異見)이 있다.
역사에 이르기를 김홍술은 의성인이다. 고려 태조와 백제 견훤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홍술이 힘써 싸웠으나 죽었다. 태조가 탄식하기를 홍술이 죽은 것이 나의 좌우 손을 다 잃은 것 같다. 후에 공을 논하고 추증들이 더해졌다. 세속에 전하기를 성황신은 대개 홍술이다. …
史云 金洪術 義城人 高麗太祖與百濟甄萱戰 大敗 洪術力戰死之 太祖嘆曰 洪術死 如失吾左右手矣 後論功追贈加等 俗傳縣城隍神 蓋洪術也 …
세속에 전하기를 홍술의 모습이 태조와 비슷하여 태조의 위의를 갖추고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신(紀信)에게 비유하였다. …
俗傳洪術貌似太祖 備儀衛 力戰而死 故以紀信比焉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사묘(祠廟) 조에서도 ‘성황사(城隍祠)는 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과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 지낸다.”라고 하였다. 태조와 비슷하여 태조의 위의를 갖추고 싸워 기신(紀信)에 비유하였다고 한 점으로 볼 때 전투의 양상이 2년 전 공산전투 당시 신숭겸의 고사(古史)를 닮았다.
성호사설 만물문(萬物門)에서도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이 죽어서 곡성현성황신(谷城縣城隍神)이 되고, 김홍술(金洪術)이 의성성황신(義城 城隍神)이 되고, 소정방(蘇定方)이 대흥성황신(大興城隍神)이 되었다.”라고 하였다.’며 홍술이 성황신이 된 것을 중국의 기신(紀信)에 비교하였다.
조선왕조에 들어 음사(淫祀)로 규제를 받으면서, 후기인 숙종대(肅宗代)에 향촌사족(鄕村士族)의 노력으로 성황사 건물이 충렬사(忠烈祠)로 바뀌었다. 사회의 유교화(儒敎化)에 발맞춰 고을의 상징이었던 인물을, 음사의 대상인 성황신에서 충절을 실천하는 유교적인 의사(義士)로 전환한 것이다.
전투의 양상 그리고 그가 죽은 뒤 봄과 가을로 향사를 지내며 기억하는 지역민들을 보았다. 군명을 지으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특히, 조문에서 문소로 그리고 의성으로 군·현의 이름을 바꾸면서 옛 지명과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면서도 좋은 뜻을 가진 새로운 지명을 탄생시키고자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별호 강주(剛州)는 어디일까?
옛 기록과 지도를 살펴보면 의성의 별호(別號)로 조문(召文), 문소(聞韶), 강주(剛州)가 있다. 삼국사기 주석(註釋)에서는 강주(剛州)를 현재의 영주로 보았다. 특히, 옛 읍지와 1872년 문소지도 주석(註釋)에 “<최치원전>에는 ‘일찍이 강주의 빙산을 유람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강주는 아마도 본 읍의 별호인 듯하다. 崔致遠傳云 嘗遊剛州氷山 剛州似是本邑別號”라고 하였으나 1932년 발간한 류상묵의 『의성지』에서는 ‘강주라는 것이 의성의 별호라고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이곳을 들를 당시 기록을 보고 강주라고 하였을 것이나, 후인은 그 사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이 『신라사초』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아닐까? 『신라사초』를 살펴보면 조문국을 벌한 4년 뒤에 강주라고 하는 주(州)를 조문국의 옛 땅에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른 곳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로운 이미지로 개선하는데 쓸모 있는 지명
지금까지 의성의 고호(古號)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무슨 이유로 지명에 대하여 관심 가질까? 유용한 점도 없을 터인데.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 지명과 관련하여 덕을 본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은혜 갚은 까치(꿩)"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왜 의성의 선비일까?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 원주 방면으로 들르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가는 길에 지인을 만나고자 할 경우 선택할 수 있겠지만 바쁜 선비가 선택할 길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전설 속의 주인공으로 의성의 선비를 선택한 데에는 의(義)로운 사람일 것이란 이미지를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읍격(邑格)을 회복하는 데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의성은 후삼국이 통일되면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에 따라 안동의 속현으로 격하되었다. 홍술이 사망하고 부로 승격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성황사가 세워지고 홍술을 성황신으로 추앙하였다. 속현으로 격하한 데 대한 항의와 함께 고려왕조에 크게 기여한 홍술의 고장임을 내세워 읍격의 회복을 호소하려는 의도였다.
안동과 의성은 신라 시기에 동일한 읍격의 ‘군(郡)’이었다. 또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격동기에 들어서는 의성보다 더 늦게 고려로 귀부하였고, 따라서 부(府)로서의 승격도 상대적으로 뒤늦었다. 더구나 의성은 ‘조문국’의 국읍이었다. 1143년(인종 21)에 주현(州縣)이 되면서 속현에서 탈출하게 되었으나, 1199년(신종 2)에 민중봉기의 책임을 물어 감무(監務)로 강등되었다. 충렬왕 때는 관원의 숫자를 줄이라는 원의 권고에 따라 한때 대구로 병합되기도 하는 등 의성의 군세는 기울었다.
1) 한국 지명학회, 『한국 지명 연구』, 2007.5. 참고
2) 韶州 福州 : 소주와 복주는 원래 중국 지명이지만 여기서는 의성과 안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 추로(鄒魯) : 공자와 맹자의 도가 발생한 근원지를 말한다. 의성을 간접적으로 가리킨 것으로 보았다.
4) 중국의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기신(紀信, ?~기원전 204년)은 한나라 고조인 유방의 부장이다. 향우가 형양에서 유방을 포위하여 상황이 매우 위급하였는데, 기신이 유방으로 변장하고 항복하여 유방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항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였다.
'최신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대한노인회의성군지회 & 의성제일요양병원’ 상호협력 협약식 체결 - ‘의료 관련 노인문제 함께 고민’ (0) | 2022.09.07 |
---|---|
‘카페 단촌역’ 주민참여와 후원으로 운영 (0) | 2022.09.07 |
학교시설인력지원팀, 폐교 현장지원 나서 (0) | 2022.09.07 |
단북 효제2리 새뜰마을사업 기본계획 시행 (0) | 2022.09.07 |
제5회 의성슈퍼푸드 마늘축제 명품의성마늘 품평회 개최 (0) | 2022.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