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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의성군 명칭 변경과 별칭에 대하여(上)(조문군, 문소군, 의성부, 강주)

의성신문 2022. 8. 24. 09:43

사적 의성금성면고분군과 조문국의 주산 금성산

1787년 간행한 의성현지(義城縣誌)는 조문(召文), 문소(聞韶), 강주(剛州)라고 하는 의성의 별호(別號)를 알려주고 있다. 이들 군명이 변경하는 과정과 그리고 별칭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 갖는 뜻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유래를 살펴 군명의 변화와 별칭에 담긴 선조들의 간절한 소망과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지명이란 공간에 대한 특성과 역사적 사실을 상징하는 고유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주라는 별칭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역주에서는 강주가 영주(榮州)라고 하였다. 1932년 류상묵이 간행한 의성지(義城誌)에서 조차도 강주가 의성의 별호(別號)라고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면서,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을 빌려 강주는 영천(榮川)이라고 하였다.

 

조문국(召文國)에서 조문군(召文郡)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를 살펴보면 지명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85(벌휴왕 2) 기록에는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임명하여 조문국을 벌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지리지에서는 문소군은 본래 조문국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의성부이다.’라고 하였다.

673(문무왕 13) 9월에는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조문성(召文城)을 쌓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벌휴왕이 조문국을 벌한 뒤 경덕왕이 지명을 개칭할 때까지 조문군(召文郡)으로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문국 조문군 문소군 의성부로 지명이 변화한 것이다.

현재 의성에 조문국박물관이 있다. 이 지역에 있던 성읍국가의 이름이 조문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소문국이라고 불러야 한다. 또는 조문국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등 이견이 분분하였다. 왜 그랬을까? 사전 등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Naver 한자사전 : 부를 소, 대추나무 조

- 강희자전(康熙字典)

첫째로, 당운(唐韻)()”는 직()과 소()의 반절(反切)이고, 집운(集韻)에 직()과 소()의 반절(反切)로서 조()의 음과 같으며, 거성(去聲)이다.

둘째로, 광운(廣韻)()”는 실()과 조()의 반절()이고, 집운(集韻)에 시()와 조()의 반절(反切)로서 소()의 음과 같다고 하였다.

- 동아한한대사전(東亞漢韓大辭典)

첫째로, “()는 부를 인데, 본음(本音)이고,

둘째로, 이다.

- 양주동의 고가연구(古歌硏究) : ()의 속음(俗音)이나 고음은라고 하였다. ()는 고 지명 기타에 ·에 음차(音借)되었다.

- 하기시마 교요(荻島敎雄)미광(微光): 소문(召文)은 금성(金城)의 훈()이니, 금성을쇠울이라 한다. 우리말 쇠를 한자로 기록하기를 소()로 하고, ()의 훈()은 월이나, 은 음편(音便)이 서로 유사함으로 문()의 훈()을 취하여 한자로 문()이라 하게 되면서 조문이라 하게 된 것이다.

 

미광(微光)은 조문군(召文郡)과 금성산(金城山)을 동일한 시대의 지명인 듯 설명하고 있으나, 금성면(金城面) 또는 금성산(金城山)이라고 하는 지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문성(召文城)에서 한자의 뜻과 음을 살려 금산석성(金山石城) 그리고 금성산(金城山)으로 새로운 지명을 파생시킨 것이다.

 

위 같은 사례를 본다면 소문국도 조문국도 모두 정답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조문국을 검색하면 관련 기록을 살펴볼 수 없다. ‘소문국으로 검색하여야만 한다. 학계에서는 대부분 소문으로 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성지역에서는 조문으로 읽고 있다. 조문초등학교, 의성조문국박물관, 조문국사적지라고 한다.

소문국(召文國)이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명장인 연개소문을 등장시킨다. 1925(대정 14) 장도빈이 저술한 개소문(蓋蘇文)에 전하는 내력에 전해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천개소문(泉蓋蘇文)의 성은 천()이다. 이름은 개소문(蓋蘇文)이며 일명 개금(蓋金)이다. 개소문의 성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이론(異論)이 있다. 개소문의 성이 천()이라 하는 이도 있고, ()이라 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확실히 연()이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세상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아직 천()으로 기록하노라.

개소문의 이름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2가지로 기록하였다. 하나는 개소문(蓋蘇文)이라 하였고, 하나는 개금(蓋金)이라 하였다. 이는 곧 소문(蘇文)또는 금()이라는 것이다. 개소문을 한자로 번역하여 보면 대금(大金)이다.

 

소문(蘇文)은 고구려말로 금을 뜻한다. 소문(召文)과 소문(蘇文)은 한자로는 표기가 다르지만, 소리는 똑같다. 당시에 한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소리만을 빌리는 음차표기가 널리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소문(召文) 또한 음차 표기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에 소문군(召文郡)을 도치한 것이 문소군(聞韶郡)이므로 이때 에도 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의성금성면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입식의 가장자리를 오린 다음 비틀어 꼬아서 만든 깃털 모양(羽毛形)으로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것들과 많이 닮았다. 학미리 고분의 석실구조에서도 고구려적인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있는 중부지방으로 향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기에 외래 문물과 접하기 좋았다는 점과 북쪽에서 남하해 온 유이민과의 관계에서 소문국이라 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특히, ‘황금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금은 위세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금성산의 옛 이름이 금산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소문(召文)이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1929927일 발행한 별건곤 제23호에 게재된 경성어록(京城語錄)이란 기사를 살펴보면 식초()의 맛은 시지만 신 것이라 하지를 아니하고 단()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필경(畢竟) 신 것이란 말이 너무 천하기에 미화(美化)한 말이다. 마치 경북(慶北) 의성(義城)이 고대(古代) 소문국(召文國)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문면(召文面)이 있는데 음()이 부인(婦人)의 소문(?門)과 같이 천한 까닭에 실제로는 문소면(文召面)이라고 고쳐서 부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소문국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지역 사람들은 소문보다 조문이라 불리기를 희망하였다. 삼국유사에서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을 미소(味炤)ㆍ미조(未祖)ㆍ미소(未召)라고도 한다.’라고 한 점을 들어 조()와 추()가 치환(置換)할 수 있는 글자로 보았다. 결과 함안의 성산산성 목간과 단양 적성비에서 이를 근거로 추문(鄒文)과 조문(召文)은 동일한 지명을 가르치는 이표기(異表記)로 이해하였다. 이로 볼 때 고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문으로 읽었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거창군 조에 가조현(加祚縣)은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본래 신라 가소현(加召縣)으로서 방언(方言)이 서로 비슷하여 조()가 변하여 조()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가소현(加召縣)을 가조현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 웅진군 자월면의 자월도(紫月島)고려사에서는 조홀도(祖忽島)’라고 표기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 자료에서는 조홀도(召忽島)라고 표기하였다. 용비어천가에서 소홀도(召忽島)’죠콜섬이라 주해하였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소홀도(召忽島)’조홀도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조문군(召文郡)에서 문소군(聞韶郡)으로

장현광의여헌집(旅軒集)에 전하는 봉대설(鳳臺說)에 조문국 사람들의 염원과 봉대에 얽힌 사연이 전하여 온다. 그중 비봉산과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자.

 

금성산 아래에 지금 조문리(召文里)가 있는데 조문은 바로 옛날의 국명(國名)이었다. 그 국명을 따라 지금 리()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이 안에는 아직도 그 옛터라고 전해 오는 것이 있다.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주산(主山)의 모양이 비봉형(飛鳳形 나는 봉황새의 모양)이라 하였으며, ()은 영특한 새인데 날아가면 머물지 않아서 복과 경사의 누림이 이에 따라 길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의 별호(別號)도 문소(聞韶)라 하니, 이 또한 조문(召文) 비봉형(飛鳳形)의 설()에 따라 구성(九成; 현재의 구봉산)에 와서 춤추었다라는 뜻을 취하여 이러한 칭호가 있었나 보다.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없어진 뒤일 뿐 아니라, 소문(召文)이란 지명은 여자의 소문(?門)과 같으므로 이를 피하여 음을 도치시켜 문소(文召)라 하였다. 하지만 문소(文召)라는 말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조문(召文)산맥이 비봉(飛鳳) 형상과 비슷하여 소성래의주의(韶成來儀主義)에 의하여 통일 후 지방제도의 개편과 함께 문소(聞韶)로 이름을 바뀌었다.

신 산경표에 의하면 날고 있는 봉황새 형상의 비봉산(飛鳳山)은 보현지맥 구무산에서 늑두산 쪽으로 뻗은 가지 줄기에 있다. 이후 오토산으로 이어지며, 두 줄기로 나뉜다. 한 줄기는 태봉산, 오동산으로 이어지며, 한 줄기는 오토산을 2.5km쯤 지나 아홉 봉우리로 이뤄진 구봉산(이전 이름은 九成山) 방면으로 향한다. 이를 조문산맥이라 하였다.

서경(書經)익직편(益稷篇)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鳳凰來儀).’라고 하였으며, 논어(論語)술이(述而) 편에 있는 고사에서는 공자가 제나라에서 머물며 소악을 들었는데, (소악이 좋아서)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 子在齊 聞韶 三月不知肉味라는 글에서 문소(聞韶)를 따온 것이다. 그중 길지만 서경(書經)익직편(益稷篇) 일부를 살펴보자.

 

서경(書經)익직편(益稷篇)명구(鳴球, 玉磬의 이름)를 알격(戞擊, 치는 것) 하며 거문고와 비파를 어루만지며(搏拊) 노래를 읊으니, 조고가 와서 이르시며 우빈(虞賓)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제후들과 덕()으로 사양합니다. 당하(堂下)에는 관악기와 도고(鼗鼓)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과 어()로 하며 생()과 용(, 큰북)을 번갈아 울리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 (簫韶九成鳳凰來義)’라고 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는 고문(古文)에서 소()로 되어 있으니, 춤추는 자가 잡는 물건이다. 설문(說文)음악의 이름을 소소(箾韶)라 한다. 이찰(李札)이 음악을 관찰할 적에 소소(箾韶)로 춤추는 자를 보았다.’하였으니, 아마도 제순(帝舜) 음악의 총칭인 듯하다. 금문(今文)에는 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옛 선비들이 퉁소(簫管)로 잘못 해석하였다. 구성(九成)은 음악이 아홉 번 끝난 것이다. ()이 아홉 번 퍼졌기 때문에 음악을 구성(九成)이라 하였으니, 구성은 주례(周禮)의 이른바 九變(아홉 번 변함)’과 같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은 이룸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봉황은 우족(羽族, 조류)의 영물이니, 수놈을 봉()이라 하고, 암놈을 황()이라 한다. 래의(來儀)는 와서 춤을 추되 용의(容儀)가 있게 한 것이다.

명구(鳴球)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읊음은 당상의 음악이고, 당하에 관악기와 조고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과 어()로 하며 생()과 용(, 큰북)을 번갈아 울림은 당하의 음악이다. 당나라 공 씨가 말하기를 음악을 시작할 때는 당상과 당하에 따라 교대로 연주하고, 번갈아 합한 뒤에 곡조가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조고(祖考)는 높은 신()이므로 당상의 음악에 말하였고, 조수(鳥獸)는 미물이므로 당하의 음악에 말하였으며, 소소(箾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이름은 신령스러움과 상서로움을 높이고 특이하게 하였기 때문에 따로 말한 것이니, 당상의 음악은 단지 신()이 이름만을 이루고 당하의 음악은 단지 짐승을 춤추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의 모양은 새의 날개와 같고 용(, 큰북)의 틀은 짐승의 모양이다. 그러므로 생()과 용()을 번갈아 울리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라고 말한 것이다. 풍속통(風俗通)()이 소생(簫笙)을 만들어 봉()을 형상화했다.’라고 하였으니, ‘그 모습과 소리가 비슷함으로 인하여 성악(聲樂)이 화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어찌 새와 짐승 그리고 봉황이 너울너울 와서 춤을 출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악이 감통(感通) 하는 묘를 알지 못한 것이다.

호파(瓠巴)가 비파를 연주하자 물속에 놀던 고기가 나와서 들었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여섯 필의 말이 먹이를 먹다가 머리를 들었으니, 소리가 상서를 이루고 물건을 부름이 경전(經傳)에 나타난 것이 많다, 더구나 순의 덕()이 위에서 화()함을 이루고, ()의 음악이 아래에서 화()함을 부르니, 신과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짐승과 봉황을 춤추게 한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소악(韶樂)을 연주함에 귀신 세계()로 신을 감동하게 하면 조고(祖考)가 와서 이르고, 인간세계()로 사람을 감동하게 하면 여러 제후가 덕으로 사양하며, 미물로 짐승들을 감동하게 하며 봉황이 용의(容儀)에 맞게 춤을 추고 짐승들이 춤을 추었으니 감동하게 해 부름이 이와 같은 이유를 권원해 보면 모두 제순(帝舜)의 덕이 천지를 덮어주고 실어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음악이 전해진 지가 천여 년이 넘었는데도 공자가 이것을 제나라에서 들었는데聞之於齊 (소악이 좋아서)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 尙且三月不知肉味 또한 말씀하시기를 음악을 만든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으니, 당시에 감동하게 하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서 감동하면서 인용하였을 선조들을 생각해 본다. 조문이란 것을 도치시켜도 보고, 인용할 생각도 하고 많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타지역보다 지명을 설정하면서 많은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