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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의성과 인연 있는 왕실(조문국 왕녀, 아시촌 소경, 홍유, 현릉원 등)

의성신문 2022. 8. 5. 09:55

지난 호에서는 연경에 얽힌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 보았다.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연경묘 봉표와 관련된 내용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의성은 왕실과의 전혀 교류가 없었을까?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안계는 신라 때 최초로 작은 서울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14(지증왕 15) 1월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으며, 그해 7월에 6()와 남쪽 지방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자들은 소경이 설치되었던 아시촌을 대부분 안계면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시혜라고 하는 옛 지명에 의한 것이다. 두 글자가 동일하기도 하지만 (*ara) 또는 阿尸(ara)가 왕()을 뜻하고, 아시혜(阿尸兮, *ara-ge)는 왕읍(王邑)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는 것이다.

양주동은 그의 고가연구에서 삼국사기 지리지문소군 조에 기록된 안현현은 본래 아시혜 또는 아을혜라고도 한다. 지금은 안정현이다. 安賢縣, 本阿尸兮縣, 一云阿乙兮 今安貞縣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아시혜(阿尸兮), 아을혜(阿乙兮)에서 앞 두 글자가 아래()라는 뜻을 가졌으며,에 음차 되었다고 하였다.

지명학6(2001)7(2002)에서 김영일 교수는 아래()를 의미하는 ‘al’은 알타이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어형이라고 하였다. 반면 부산대학교 이병선 교수는 아라(阿羅), 안라(安羅) 지명의 어원과 그 비정문제라는 기고문에서 지명의 어원과 그 비정 문제를 논하면서, 아시혜(阿尸兮)安賢의 대응 관계에서, 아시(阿尸)와 안()이 그리고 혜()와 현()이 접미사로 대응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ra 혹은 r을 가지는 V(母音)의 표기로 생각할 때 두 글자는 ara를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적으로도 6부와 남쪽 지방 백성들을 먹여 살릴 넓은 안계평야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천과 낙동강이 인근에 있어 수운을 활용할 수 있었으며, 고구려와 백제 방면과 교류하기에도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있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왕비를 배출하는 인통(姻統)이 된 조문국의 여인

화랑세기미추 대왕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의 인통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라고 했다. 까닭에 세상에 이 계통을 진골정통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조문국의 왕녀인 운모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이 아니다.’하였다.

인통이란 부계에 대칭되는 여계 계승을 말한다. 보도(保道)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인데 내숙공(乃宿公)의 딸이다. 선혜(善兮)의 어머니는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鳥生)의 어머니는 아노(阿老)이고, 아노의 어머니는 내류(內留)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光明)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보(紅帽)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옥모(玉帽)이다.

 

신라말 고려 초기의 홍유와 홍술은 의성 출신이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까지 동일한 시대를 살다 간 홍유와 홍술은 의성 출신이었다. 홍유의 딸은 태조의 부인이 되었으며, 태조가 죽음을 애도하던 인물은 홍술이다. 먼저 홍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며, 그의 딸은 왕건의 비가 되었다.

홍유의 초명(初名)은 술(, 삼국사기에서는 )이고, 의성 사람이다. 궁예 말년에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기병 장수가 되었는데, 은밀히 모의하여 태조의 집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태조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추대한 공적을 책봉하였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은 모두 1등으로 (홍유는) 대상(大相)으로 승진하였다. 919(태조 2)에 오산성을 예산현으로 바꾸고, 홍유와 대상 애선을 보내어 유민 500여 호를 정착시켰다.

홍유의 딸은 태조의 아내가 되었다. 태조의 제26비 의성부원부인의 소생인 의성부원대군은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소생의 공주와 혼인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사후에 충렬의 시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묘정에 태사개국충렬공(太師開國忠烈公)으로 배향되었다.

그러나 홍술과 홍유의 처음 이름이 같아 오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신증동국여지승람의성현 조에 의하면 고려 조를 창업하던 당시에 큰 업적을 남긴 별도의 인물로 기술되어 있다.

고려 김홍술(金洪術)은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의 아전[]으로서 성주(城主)가 되었다. 태조 12년 가을에 견훤(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으로 쳐들어와 홍술이 전사하니, 태조가 울면서, “나는 좌우의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홍유(洪儒)는 궁예(弓裔)의 말년에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청주(靑州)가 배반하자. 유가 유검필(庚黔弼)과 더불어 진주(鎭州)를 진압했으므로 청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19년에 백제(百濟 후백제) 토벌에 따라가서 이를 멸망시켰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안동은 신라시기 의성과 동일한 읍격의 군()이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격동기에 의성보다 늦게 귀부하였다. 따라서 부()로의 승격도 상대적으로 뒤늦었다. 그러나 1018(현종 9)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급전직하하여 안동부 관할의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다행히 성황신으로 고려 왕조에 큰 공을 세운 홍술을 추앙하여 그의 연고지임을 부각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곧바로 읍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옥산은 고려 말 공민왕이 머물렀던 곳이다.

의성지명 유래에 고려 공민왕에서 유래한 지명이 옥산면 지역에 유독 많다. 성을 쌓은 흔적이 있어 성골(城谷), 몰고 온 말이 많았다고 하여 마전(馬田), ()을 보던 곳이라 하여 망곡(望谷)고개라 하는 지명은 모두 공민왕과 관련한 지명이다. 면 이름 또한 공민왕과 관련한 것이다. 주민들이 선바위 뒷산에서 푸른 옥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고 하여 옥산(玉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과거 읍내 유다리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로 기와밟기라는 것이 있었다. 남북으로 대결하는 이 놀이를 진행하기 이전 모군을 위하여 자기 동네를 먼저 돈다. 행진하면서 동네 처녀들이 자기네 공주를 옹위하여 사람 다리를 건너 유다리까지 행진하게 된다. 이때 기와밟기 노래를 부른다. ‘이 기와가 누 기완고 나랏님의 옥기왈세유다리에 다다르면 남쪽의 사람들은 점실(점곡) 옥산 들거라(덤벼라)’하면, 북쪽의 사람들은 조문(금성) 춘산 들거라(범벼라)’하며 외치며 나아갔다 물러났다를 반복하며 상대편의 기마를 부딪치며 부수는 것이다. 옥산 사람들이 참여하는 놀이에 옥기와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옥산면 지역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과거 안동부(安東府) 영현이었던 일계현(日谿縣)이었다. 고려 말 공민왕의 몽진과 관련된 놀이이다. 의성에서도 한때 공민왕이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도 왕실과의 인연은 깊었다.

1457(세조 3) 단종 복위의 실패하면서 관련된 종친들과 대신들의 전지를 나누어 줄 당시 권저(權著)의 의성 전지를 청성위 옹주에게 내려준다. 전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개화기 때 세금을 은화로 납부하라는 지시에 청송의 심 부자가 의성 안계에 있는 전답을 팔아서 화폐로 바꾸자니 안계 고을의 돈이란 돈은 전부 모였다고 했다. 그 옮기는 행렬이 10리나 뻗쳤었다고 한다.

1791(정조 15) 화유옹주와 황인점 사이에 태어난 황기옥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였다. 화유옹주는 많은 영조의 딸 중에 정조대까지 살아남았던 3명의 옹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남은 두 사람 또한 폐서인이 되거나 옹주 작위만 근근이 유지하였다. 그의 아들이 부임지 의성에서 시제를 지내던 글(和柔翁主祠版義城任所奉往時祭文)이 전하는 것으로 볼 때 현령을 지냈던 게 틀림이 없다.

홍재전서에 전하는 정조의 화유옹주묘치제문(和柔翁主墓致祭文)으로 볼 때 고모에 대해 지극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옹주의 자녀가 지역 현령으로 재직할 정도로 왕실과도 인연을 쌓았다.

 

曰我姑母 / 나의 고모시여

柔嘉維則 /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蚤夜鞶衿 /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不遺寸尺 /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1789년부터 1793년까지 현릉원(顯隆園)을 수호 관리하기 위한 규정과 원소(園所) 보호를 위한 식목(植木), 보토(補土) 등의 사업을 기록한 수원부(水原府) () 현륭원등록(顯隆園謄錄)이 있다.

현릉원등록 권1에 기록된 내용

본 내용의 첫 번째 부분은 원소정례(園所定例)이다. 원소의 운영과 능의 관리에 대한 규정이 적혀있다. 현륭원의 형국(形局)과 좌향(坐向), 원상(園上)에 배설이 되는 석물의 종류와 숫자 등이 대부분이다. 의성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러한 것인지 채제공(蔡濟恭)이 좌의정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의성과 관련을 맺게 된다. 강원도 원주(原州)에 있는 향탄산(香炭山) 운영 규정, 의성현(義城縣)에 있는 위전(位田)에 대한 규정도 기록되어 있다.

의성에 연경묘 향탄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요즘으로 말하면 현릉원을 위한 목적세를 내는 의성현의 위전(位田)으로는 다음과 같이 지정되어 있다.

옥산면(玉山面) : 9() 96() 8()

금곡면(金谷面) : 8() 42() 2()

소야면(巢野面) : 6() 73()

하천면(下川面) : 4() 23() 3()

안평면(安平面) : 6() 56() 9()

단촌면(丹村面) : 4() 83() 2()

전통사찰총서 16에 전하는 이야기로 구전되기로는 현재의 지장사 요사에 걸려 있는 지장사(地藏寺) 편액이 숙종(肅宗, 1675~1719)의 친필로 어느 해인가 이곳에 들러서 쓴 글이라는 것이다. 그 뒤 하마비(下馬碑)와 어각(御閣)이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1882(고종 19)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 남겨 둔 축원문은 1970년대 이후 사라졌다. 숙종의 친필도 없어졌으나 하마비는 아직 남았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관리하고 조달하던 상의원(尙衣院)에서 1890년부터 1908년까지 궁중에 소요되는 품목의 내역을 기록해 놓은 상방각양전례등록(尙方各樣前例謄錄)에 의하면 호남의 순천과 옥과, 호서의 천안, 양서지방의 평안 그리고 영남의 성주와 의성이 공물(貢物)의 주된 공급지였다. 궁중에 소요되는 물품의 공급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