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시비是非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주장이 대립하여 팽팽할 때 대립하는 둘이 다 틀렸다는 양비론兩非論과 둘이 다 맞다는 양시론兩是論이 있다.
양비론
이때 대립되는 주장은 나름대로의 근거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이 있어서 단순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때문에 양비론은 언뜻 타당해 보인다. 양비론의 주장들은 어떤 주제에 대한 첫 번째 주장이 나온 이후 이에 반박하는 두 번째 주장이 나오고, 다음에 양자를 모두 비판하는 주장으로 등장하면서 세 가지 입장이 많은 이론들의 기본 골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세 번째로 나온 이론이 양비론이 된다.
양비론에서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일단 끝까지 대립되는 두 주장 모두에 비판적인 경우를 양비론이라고 하기로 하자. 이렇게 모두 틀렸다고 하는 양비론의 문제점은 둘 다를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잘못에도 경중이 있고 처해진 맥락도 있고 놓인 관계도 있다.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틀려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비론 비판을 남용할 경우에는 진실로 정당한 비판마저도 흑백논리로 몰아버릴 수 있다. 양측의 주장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 양측의 오류들을 지적하는 정당한 비판마저도 양비론으로 몰아세우는 형식이 되기도 한다.
양비론은 주로 가해자에 의하여 남용된다. 가해자에게 있어 양비론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거꾸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비론은 정치적으로 즐겨 사용된다. 상대방의 옳은 의견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시론
양시론은 네 말도 옳고 쟤 말도 옳다는 것이다. 양비론이나 양시론은 논리의 전개 과정에서 분명하게 차이가 있으나 어느 한 의견에 쏠리지 않고 중립 즉 다른 의견을 유지한다. 양시론자는 양비론자에 비해 좀 더 인간답고 훈훈하게 비춰질 수 있겠으나 양시론도 두 의견 사이의 중립을 추구할 뿐 정작 해답을 내놓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양비론과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네가 옳지만 저런 상황에서는 쟤가 옳다는 식으로 뭐가 어떻게 옳은지를 정확히 제시하여야 양시론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
양시론으로 둘 다를 부정하든 양시론으로 둘 다를 긍정하든 양자간의 시비是非는 분명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분명하게 다른 양비론과 양시론이 진실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양비론자兩非論者
양비론자는 스스로 멋있어 한다. 자기도취요 위선이다. 그러나 양비론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로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상相을 보이는 대로 부수고 본질을 직관하여야 비로소 양비론의 출구가 보이는 것이다.
필자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보면서 “진보를 만나면 진보 죽이고, 보수를 만나면 보수 죽여라. 그러면 사람 보이고 나라 보일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양시론자兩是論者
양시론자는 스스로 뿌듯해 한다. 기회주의자요 실체에 대해서는 사기다. 그러나 양시론은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음’ 즉 불이不二에 있다. 또한 ‘모두가 같지도 않음’ 즉 불일不一에 있다.
필자는 진보와 보수의 자리를 보면서 “진보는 보수를 부처로 보라. 보수도 진보를 부처로 보라.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지점에서 사람 보이고 나라 보일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양비론과 양시론의 지평
이이헌履二軒에서 주민자치를 두고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시민단체의 태도를 살펴보고 위선자가 되어버린 시민운동가의 행태를 통하여 정리한 양비론과 양시론의 관계입니다.

양비론자는 제기된 서로 다른 주장이 모두 틀리다는 것만으로 양비의 주장이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반드시 둘 다가 맞을 수 있는 공약수를 찾아내어야 한다. 공약수 없이 둘 다를 틀리다고 하는 것은 오만이요 사기에 불과하다.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들어서 적폐라고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도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여 내로남불의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양시론자는 제기된 서로 다른 주장들이 통합될 수 있는 지편紙片인 공배수를 확보하여야 한다. 공배수 없이 둘 다 맞다고 양시를 하든 심지어는 셋 다 맞다고 삼시三是를 하든 그것은 처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민자치에 가하는 패악질
양시兩是를 하면서 최소공배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 양시는 처세를 위한 허풍이고 위선이다. 양비兩非를 하면서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 양비는 이득을 위한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주민자치에서 양비의 비겁함과 양시의 기회적인 짓을 동시에 저질렀다.
주민들에게는 주민자치회를 만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주민자치회를 운영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다. 주민들에게는 천부적으로 이미 결사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자치회라는 조례로 기본권인 결사의 자유조차도 박탈하여 버렸다. 주민자치를 하라는 조례로 주민자치를 막아 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시민과 주민을 수직으로 분리하고 대립적으로 지배·복종의 구도를 제도화하려는 획책으로 시민운동가들을 조선의 사대부로 만들려는 것으로 보인다. 주민자치를 주민자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로 하자는 것이다.
주민자치는 시장·군수·구청장의 것이 아니다
주민자치회 설치도 시장·군수·구청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행·재정적 지원도 시장·군수·구청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행안부의 폭력적인 시범실시에 전국의 자치단체 중 40여개가 시범실시의 주민자치회의 전면실시로 호응하고 있다. 주로 민주당의 단체장들이다. 민주당의 정치세력과 단체장이 손을 잡고 시민단체를 하수인으로 하여 주민자치 지배를 획책하는 것이다.
여러 차례 문재인 정부에도 경고를 했다. 먼저 주민자치에서 정치인들은 손을 떼라. 주민자치는 정치가 아니다. 단체장들도 손을 떼라. 주민자치는 주민자치이지 단체자치가 아니다. 주민자치는 주민들에게 맡겨라. 주민자치를 시민단체에게 맡기지 마라. 주민자치의 지원도 주민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지 단체장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주민자치는 마을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최적의 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양비와 양시가 난무하겠지만 결국은 교집합이나 합집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을 시민운동가 시켜서 컨설팅 한답시고 어거지를 써서 볼품없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절대로 주민자치가 아니라 시장·군수·구청장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는 횡포다.
주민자치는 주민들이 동네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다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던 허후許厚의 시비음是非吟이다.
시비진시시환비 是非眞是是還非 진정 옳은 것을 시비하면 옳은 것도 그른 것이 되니
불필수파강시비 不必隨波强是非 시비의 파고에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네
각망시비고착안 却忘是非高着眼 시비를 잊고 눈을 높은 곳에 두면
역능시시우비비 力能是是又非非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할 수 있으리
여기서 허후가 말하는 고착안高着眼이란, 양비론은 공약수로 넘어서서 위선을 극복하고 양시론은 공배수로 넘어서서 탐욕성을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주민들이 하면 주민자치가 되고 시민단체들이 하면 시민운동이 된다.
주민자치의 주체는 주민이어야 하고 대상도 주민이어야 하고 내용도 주민이어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기본이다. 주민자치에 도움을 준다고 속이면서 시민운동과 물타기하여 종국에서 시민단체가 주민자치회 지배하는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하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주민자치회는 모두 걷어내어야 한다.
진정한 주민자치로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상식이 있는 마을 위하여 고착안高着眼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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