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陵往事與誰論 금릉의 지나간 일 누구와 더불어 논할까
千載猶存敬德墳 천년이 지난 지금 경덕왕의 무덤만이 남았네
飛鳳曲亡人不見 비봉곡은 없어지고 사람은 볼 수 없는데
召文琴去杳難聞 조문금 가고 나니 아득하여 듣기 어렵네
삼한 때에 거느리던 여러 나라가 혹 50, 혹 70개였는데 바둑판처럼 펼쳐있고 별처럼 널려있었다. 땅의 경계가 서로 접하고 연이어 있어 땅의 크기가 커 봤자 사방 100리에 불과하였다.
조문국은 문소현 동남쪽 빙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도 궁궐터가 아직 남아있다. 거친 숲과 묵은 풀 가운데 무덤이 겹겹이 있는데 모두 당시 군왕의 묘이다. 밭두둑 사이에 꽃밭이 있었는데, 모란이 멋대로 자라 해마다 꽃이 피고 지는데 농부들이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 당시 임금이 꽃을 감상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밭을 가는 농부의 쟁기가 땅을 갈다가 때때로 돌에 부딪힐 때면 땅속에서 음악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 모르겠지만 나라가 망할 무렵 영인(伶人, 음악을 맡은 벼슬아치) 등이 악기를 그 아래에 묻어 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라가 망하고 남은 원혼이 황천 아래에 맺혀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노인이 꿈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고 옷이 훤칠하였다. 그가 시를 지어 노인에게 주었는데,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노인이 놀라 깨어나서는 사람들에게 외워 전하였는데, 노인은 일자 무식꾼이었다.
비봉(飛鳳)은 산 이름으로 조문국의 서남쪽에 있다. 아! 오래된 도읍의 남은 터가 비록 수천 년이나 흘렀지만, 사람의 정신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아 간혹 꿈속에서 서로 감응하는 수가 있다. 이른바 꿈속의 노인이라는 것은 아마도 당시 인물의 정령인가 보다.
- 1589년 7월 11일 자 『초간 일기』에서
의성 금성면 고분군(사적)에 있는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후 윤형로의 『계구암집(戒懼菴集)』과 신좌모의 『담인집(澹人集)』으로 이어졌다.
『의성승감』과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조문국 옛터 서쪽(구련리와 초전리 사이)에 화전(花田)이 있다고 하였다. 산수유 꽃피는 화전리(禾全里)는 해마다 벼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의미이다. ‘꽃 피는 마을’이란 이곳을 두고서 부른 이름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모란이 무더기로 자라는 밭이 있는데, 이것을 뽑아내도 바로 다시 돋아나서 매년 봄이면 꽃과 잎이 매우 무성하나 이것을 다른 땅에 옮겨 심으면 반드시 말라 죽는다.’라고 하였다. 뽑아도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 작약이다. 또한 가을에 옮겨 심어야 하는 작약을 여름철에 옮겨 심으면 말라 죽는다.
과거 기록에 의하여 고분군 내에 식재된 꽃에 대한 이야기를 엮고자 한다.
꽃들의 왕 모란과 꽃들의 재상 작약으로 유명해진 의성의 명승고적
송의 이격비(李格非)라는 사람이 편찬한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라는 책에 낙양엔 꽃의 품종이 매우 많지만, 오직 모란을 이름하여 화왕(花王)이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모란 중에도 낙양 요씨 집의 노란 모란 요황(姚黃)이 화왕이요, 위씨 집안의 붉은 모란 위지(魏紫)가 화후(花后)라고도 하였다.
18세기의 우리나라의 학자 이이순(李頤淳)도 자신의 집 정원에 키우는 꽃에 벼슬을 내렸다. 가장 아름다운 모란은 화왕(花王)이라 하고, 모란에 버금가는 작약은 꽃의 재상 화상(花相)이라 하였다.
작약은 진통과 어린이 액정화 등에 효험이 있어 십전대보탕, 사물탕, 작약 감초탕 등에 필수 약재이다. 건조 기술이 우수하여 의성 작약은 전국 제일로 인정을 받았다. 의성의 작약이 중국, 일본, 독일 등지로 팔려나갔다. 작약의 주산지인 의성은 1995년 기준 전국 재배면적의 34.5%에 달하는 305ha에 작약을 심었다. 작약꽃이 일제히 개화하는 5월 말쯤 사곡면에서는 축제가 열렸으며, 사진작가가 많이 찾아왔었다.
값싼 중국산 작약이 수입되면서 그 많던 의성의 작약밭이 마늘밭, 고추밭으로 바뀌어 나갔다. 의성 작약시험장도 간판이 바뀌었다. 매우 다양한 작약꽃이 피었다 지고는 했으나 더 볼 수 없다. 1927년 1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의성의 명승고적(名勝古蹟)의 하나로 주목받던 경덕왕릉 주변으로 유교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작약을 심게 되면서 꽃 감상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문국의 왕만이 아니라 누구나 작약꽃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경사지에 심어진 작약꽃과 하늘의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흰색 모란과 작약은 난초보다 더 강한 향기가 있다. 경덕왕릉 앞쪽에 최근 모란꽃밭을 조성했다. 모란은 작약보다 보름정도 이르게 꽃을 피운다. 감상기간을 늘렸다. 붉은 작약꽃과 어울린 푸른 하늘. 그리고 향기에 잠시 취해보자.
짙은 향기와 함께하는 국화 꽃길
봄날 밭두둑 가를 거닐어 보니
壟頭春日步逍遙
구름 기운 사라져 날씨가 좋구나.
好是天晴雲氣消
서리 맞은 꽃 사랑해 국화길 찾고
黃愛迎霜尋菊逕
…
- 권치(權緻, 1683~1766)의 토헌문집(土軒文集)에서
‘조문 옛 도읍에서 우연히 읊다(召文故都偶占)’라는 옛 시구에 국화와 관련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가을철이 되면 조문정을 지나 고분전시관에 이르는 길 아래 둑에 토종 국화꽃이 핀다. 향기가 그윽하다.
『예기』 「월령(月令)」의 늦가을(季秋之月) 등에 의하여 오색과 오방, 오행으로 국화의 특성을 따져보자. 전통시대 오색(五色)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이다. 국화의 황색은 오방(五方) 중 가운데를 지칭하므로 바른 색이라 하여 정색(正色)이라 하였다. 그래서 가장 높게 쳤다. 또한 황색은 오행 중 토(土)에 해당한다. 토에서 금(金)이 생겨나므로 금을 맞아 피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은 방위로는 서쪽, 계절로는 가을이다.
국화는 심성을 수양하고 생명을 연장한다고 한다. 역현(酈縣) 사람들이 국수(菊水)를 마셔 장수하였다고도 한다.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하서전집』에 전해오는 오언절구에 장수(長壽)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재미있는 시가 있다.
細君採菊來 아내가 국화 따 온 것은
以爲山翁壽 시골 늙은이 오래 살라 한 것
東牕映秋暉 동창에 가을 햇살 어리는데
狂詩吟醉後 술에 취해 미친 듯 시를 읊는다
- 김인후, 「아내에게 주다(贈內)」
역사 담은 문익점면작기념비와 목화
일제 강점기에 건립한 삼우당 문익점선생면작기념비가 의성 금성면 고분군(사적) 안에 있다. 이곳 외에 1909년 제오리 원전(元田)에 세운 목면유전표가 있다. 더하여 1991년 의성군수가 세운 기념비도 있다. 경남 산청이 아닌 이곳에 면작을 기념하는 비가 3개나 세워진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규장각 도서 『목면화기(木綿花記)』에는 전 의금부도사 김도화가 쓴 「충선공삼우당문선생목면유전표(忠宣公三憂堂文先生木綿遺田表)」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유전(遺田)이 금성면 제오동에 있음도 밝히고 있다. 봉강서원묘허비명(鳳岡書院廟墟碑銘)과 『삼우당문선생실기(三憂堂文先生實紀)』의 ‘봉강서원이건기(鳳岡書院移建記)’에는 조정에서 의성현의 남쪽 만천에 사당을 세우도록 하였다는 내용과 옮겨 세우는 과정도 밝히고 있다. 옮겨 세운 시기가 1861년(철종 12)이니 여타 기록보다 시대가 앞선다. 서원을 창건하기는 당연히 그 이전일 것이므로 연원이 오래됨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이석이 지은 『속박물지』에 “면화 종자는 번우 사신 황시(皇始)가 갖고 온 것이라 하여, 지금 광주(廣州) 지방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준다”라고 하였다. 광주에서 황시의 공로를 대우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문익점을 대우하는 것과 같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는 최무선과 문익점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사 지내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관리로서 채용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이 당시 사당이 세워진 것이리라.
1401년(태종 1)에 참찬 권근의 상서로 문익점의 아들 문중용(文中庸)을 사헌 감찰(司憲監察)로,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 주부(軍器注簿)로 이미 채용했다. 이 당시 손자들도 벼슬길에 올랐으리라. 문승로는 의성현령으로 토질 적합한 제오리의 밭을 사서 목화를 재배하였다.
『삼우당 실기』와 1922년 1월 『개벽』 제19호 논설에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만든 거핵거(去核車)는 씨를 뽑아 솜으로 만드는 기구이다. 속 솜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로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來)가 만든 물레(繅絲車)를 통하여 실을 뽑아냈으며, 인근 일선(선산의 옛 지명) 부사로 퇴직한 뒤 해평에서 살던 문영(文英)이 베틀을 만들었다. ‘씨앗기’라고 하여 씨를 뺀 솜은 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럼 만든 무명 활(솜활)로 타는데, 활 끝의 진동에 따라 솜이 피어난다. 이것을 수수깡이나 참대로 길고 둥글게 말아 빼면 고치가 된다. 고치 말기가 끝나면 물레질을 하여 면사(綿絲)를 뽑아내게 되며, 면포를 직조하게 된다.
목면 재배에 성공해도 씨를 제거(去核)하거나 직조(織造)하는 과정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문승로가 목화 재배를 권농할 시기는 직조 기술이 모두 마련된 상태이다. 목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목화재배도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최근까지 기념비 인근에 목화를 재배하였다. 연한 크림 빛깔의 꽃이 피어나서 질 무렵에는 연분홍으로 변한다. 다래가 익어 터지면서는 하얀 꽃으로 거듭난다. 다시금 그 모습 바라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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