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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절의정신

의성신문 2017. 1. 25. 09:47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절의정신


김창회 본지주필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를 일러 세상 사람들은 삼은(三隱)이라고 한다. 이미 세상에 잘 알려졌지만 길재의 충효정신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재보(再父)이며 선산(善山)사람이다. 일찍이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공부하고 개경(開京)에 올라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權近)에게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정과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교육시켰으며 1389년 창왕(昌王) 당시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승진되었으나 늙은 어머님의 봉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회군으로 조선이 건국되고 평소에 친교가 두터웠던 이방원(李芳遠, 뒤에 태종대왕)에 의해 태상학 박사가 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거절하고 고향에서 후학교육에 전력을 경주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특히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전수하고 김종직(金宗直), 김광필(金光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도학의 연원대통을 형성하였다. 사후에는 선산의 금오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인동의 오산서원에 제향되고 시호는 충절(忠節)이며, 특히 금오서원은 대원군 당시 국령으로 서원을 훼철시킬 때에도 그대로 존속하였으니 그 위상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님이 보성대관이라는 벼슬자리에 올라 임지로 가자 어머니도 함께 따라 갔음으로 외가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 때 겨우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다. 늦은 봄의 어느 날 길재는 남계(南溪)라는 시냇가에 나가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놀 때가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냇가에 갔는데 새끼 자라 한 마리를 잡았다. 자라가 하도 신기하여 그것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의 생각을 잊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자라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어머니가 멀리 계셔서 슬픈데 너는 나 때문에 너의 어머니를 잃었구나 하며 잡은 자라를 물속에 도로 넣어준 뒤에 엉엉 울었다. 이웃 사람들은 길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효심을 기특히 여겼다. 성장하여 학문이 성취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을 때 이성계의 무신세력이 창왕을 폐위시키고 최영(崔瑩), 정몽주 등 충신들을 살해하였다. 고려 조정은 풍전등화요. 언제 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길재는 그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없는지라 2년 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망국의 슬픔을 달래었던 것이다. 길재는 꿈속에서도 고려조의 임금을 생각하고 정의롭게 최후를 마친 최영과 정몽주를 머릿속에 그리며 살아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세상을 등지고 지내기로 결심하였다. 틈만 있으면 책을 읽으며 어머님께 효도하는 것이 뜻이요 소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돌보아 드리고 겨울에는 옷을 따뜻하게 입혀드리는 일까지 손수 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하고 싶다고 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묘소에 여막을 짓고 삼년 간 시묘살이도 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고려조의 서울 개성에 들린 적이 있었다. 궁궐터 만월대에 주춧돌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길게 탄식하며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은 꿈이런가 하노라


만약에 그가 이성계의 편에 서서 조선 건국을 도왔다면 만년에 높은 벼슬자리를 얻고 늙어서도 고생하지 않고 호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방백세(流芳百世)의 성리학풍을 후세에 길이 전했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후세의 사표가 되었다. 남긴 시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臨溪茅屋獨閑居 시냇가에 띠집 짓고 홀로서 사노라니
月白風淸興有餘 달은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남아돈다
外客不來山鳥語 찾아오는 손님 없고 산새는 지저귀니
移床竹塢臥看書 대밭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서 글 읽으리


1419년 세종 원년에 세상을 떠나시니 선산 고을 사람들은 그 학력을 추모하여 금오산(金烏山) 기슭에 서원을 세우고 금오서원이라 사액 받았으며 길재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 드린다. 세상은 지금 삼가리를 풀어 헤친 것처럼 어수선 하고 뒤숭숭하다. 길재선생의 충과 효와 절의의 정신으로 세상을 교화하고 학덕은 후세에 전해지기 바라면서 선인들의 행적을 한 번 읽고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이 글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