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마하트마 간디의 祖國사랑
권용우(단국대 명예교수)
1948년 1월 30일, 이 날은 인도(印度)의 민족운동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K. Gandhi)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사우라슈트라주(Saurashtra州)의 항구도시 포르반다르(Porbandar)에서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Karamchand Gandhi)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신앙심(信仰心) 깊은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1887년에 영국(英國)으로 유학, 런던(London)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1891년 6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무료변론과 독립운동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첫 번째 활동무대는 영국의 식민지(植民地) 남아프리카에서였다. 그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얼마 후인 1893년 4월 남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이 곳에 살고 있는 인도인(印度人)들의 인권(人權) 향상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정착한 곳은 나탈(Natal)이었다.
이 때, 이 곳 남아프리카는 백인(白人) 정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인도인 약 7만여명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백인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간디의 궁금증은 ‘왜, 남아프리카에서는 인도인을 이토록 차별하는 것일까?’였다. 간디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처럼 간디가 이 곳에 와서 맞게 된 첫 경험이 인도인의 인종차별이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조국(祖國) 사랑에 눈뜨게 하였다. 인도인은 기차의 1등석에 앉을 수 없었으며, 백인 전용호텔에 출입이 금지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지정된 장소 이외에서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었다. 남아프리카는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지옥(地獄)의 땅이었다.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894년, 나탈주(州) 정부는 인도인에게 선거권(選擧權)을 박탈하는 법안(法案)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법안이 입법원(立法院)을 통과하게 되면 인도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만다. 간디는 이 법안이 입법원에서 통과되지 않도록 하려면 인도인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시작이 「나탈 인도국민의회(印度國民議會)」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간디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인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법안 반대운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 명단과 청원서(請願書)를 입법원에 보내고, 신문사에도 탄원서(歎願書)를 보냈다. 그러나, 그 법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재는 넘을수록 험하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는 말이 있다. 1906년, 트란스발(Transvaal) 정부는「아시아인 등록법(登錄法)」을 만들어 인도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인도인은 누구나 8세가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이름ㆍ나이ㆍ직업ㆍ주소, 그리고 지문(指紋)을 등록하고, 등록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대부분은 등록출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치안판사에 의하여 추방명령을 받고 쫒겨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간디도 수백명의 다른 인도인들과 징역형을 선고받고,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것이 1907년의 일이었다.
印度 獨立의 아버지
이처럼 간디는 오로지 인도인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하루 하루 삶을 이어갔다. 이 때, 미국의 문필가이며 사상가인 도로우(Thoreau, Henry David : 1817~1862)의 논문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 1849)은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악(惡)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결론을 얻었다.
간디의 운동방식은 철저히 ‘비폭력 저항운동’(사티아그라하, satyagraha)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참여한 인도인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어야 했다. 이것이 ‘톨스토이 농장’이었다. 이는 요하네스버그에 마련한 농장의 이름이다. ‘톨스토이 농장’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Tolstoy, L. N. : 1828~1910)의 소박한 시골에서의 삶을 본받은 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의 평화의 보금자리였다.
‘톨스토이 농장’에서 간디가 해야 할 첫 번째의 일은 고용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이 곳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도인 계약노동자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다. 영국인(英國人) 고용주는 이들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대하고, 때로는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간디는 고용주를 만나서 설득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소송도 스스로 처리해야만 했다. 간디가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 간디는 남아프리카에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 빨리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22년간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뒤로 하고 인도로 돌아갔다. 1915년의 일이었다.
이 때, 간디와 고칼레(Gokhale, G. K. : 1866~1915)의 만남은 간디로 하여금 조국(祖國)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 간디는 구자라트(Gujarat) 사바르마티(Sabarmati)에 아쉬람(Ashram, 공동체)을 건설하고, 이 곳에서 봉사활동과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 때가 1915년 5월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世界大戰) 때 인도는 영국을 위해 인적ㆍ물적 협력을 제공하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약속한 인도의 독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탄압은 여전했다. 이에 간디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이제 조국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을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때, 곳곳에서 인도의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들러왔다. “영국이여, 인도를 떠나라.” 간디는 군중들 앞에서 “폭력으로 영국에 대항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외치면서, 비폭력을 호소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소금 행진’(Salt March)으로 그 절정을 맞았다. 1930년, 영국이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인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물리자 간디는 이에 항거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을 출발하여 390km 떨어진 단디(Dandhi) 해변을 향한 첫 발걸음을 띠었다. 많은 인도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4월 6일, 드디어 단디 해변에 도착하였다. 간디는 해변에서 소금 한 줌을 입에 넣었다. 작지만 참으로 위대한 결과였다. 이것이 인도의 독립을 열어가는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남긴 명언, “조국(祖國)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민족(民族)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나의 희망이요, 목표이다”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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