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託과 贊託의 소용돌이를 극복하다
권용우
(단국대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이 날 35년간 일제(日帝)의 억압에서 광복(光復)을 맞이하면서 기쁨을 누렸지만, 그 기쁨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종전(終戰)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하여, 북(北)에는 소련군이, 남(南)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각각 군정(軍政)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미국ㆍ영국ㆍ소련 세 나라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삼상회의(Moscow三相會議)가 개최되고, 여기서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열리게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한국의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 관한 논의를 하였지만, 미ㆍ소 두 나라가 이견(異見)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5년간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을 토대로 한 것이었는데, 미ㆍ소 두 나라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단체들도 반탁(反託)과 찬탁(贊託)으로 나뉘어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한반도(韓半島)의 신탁통치안은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비롯되었다. 1945년 2월 4~11일 개최되었던 얄타회담에서 독일(獨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식민지(植民地)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한국문제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 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 F. D.)가 한국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는 판단하에 5년 이상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소련 수상 스탈린(Stalin, J.)이 동의함으로써 신탁통치안이 확정되었다. 얄타회담의 이러한 결정은 1943년 11월 22~26일에 개최되었던 제1차 카이로회담(Cairo Conference)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특별의제로 다루어지면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라는 결정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은 이처럼 두 차례의 회담을 거쳐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신탁통치안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반탁으로 가닥이 잡혀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좌익세력이 삼상회의의 결정안을 지지함으로써 큰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1946년 2월 15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발족하면서 찬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반탁과 찬탁의 갈등은 극에 다달았다.
1946년 3월 20일,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치협약을 작성하려고 했지만, 첫 걸음부터 제대로 뗄 수가 없었다. 첫 째의 걸림돌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거머쥐느냐로 시작된 미ㆍ소의 대립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협상대상자의 선정을 위한 좌우익의 비율문제로 또 다시 미ㆍ소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미ㆍ소의 갈등이 북위 38도선을 가로질러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는 분단(分斷)의 아픔을 낳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겨서 해결하려는 가닥을 잡았다. 이에 소련은 미국의 조치가 삼상회의의 결정에 위반한 것이라는 반론을 폈지만, UN은 1947년 11월 14일 ‘UN의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總選擧)를 통한 통일방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호주ㆍ캐나다ㆍ중국ㆍ엘살바도르ㆍ프랑스ㆍ인도ㆍ필리핀ㆍ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UN 한국임시위원단」을 조직하여 한반도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UN의 결정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이었다. UN은 북한의 반대의 벽에 부딪치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실시안’을 채택하였다.
大韓民國 建國의 첫 걸음을 떼다
이로써 남한은 UN 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고, 제헌국회(制憲國會)를 열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헌법(憲法)을 제정ㆍ공포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하여 8월 15일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을 탄생시켰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사실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12일 제3차 UN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그로부터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68년 동안 수많은 고난과 슬픔을 슬기롭게 이겨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보릿고개’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ㆍ25전쟁도, 이로부터 수 없이 이어지는 북한의 무력도발(武力挑發)도, 민주화(民主化)를 위한 진통도,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모두 잘 이겨내고, 이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세계 13위의 경제대국(經濟大國)으로 우뚝 섰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립한 신생국가(新生國家) 가운데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룩한 유일한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2011년 12월 5일, 연간무역(年間貿易) 1조(兆)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세계에서 ‘무역 아홉 번째의 국가’로 우뚝 섰다. 이는 1948년 건국한 지 63년, 1962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수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한지 50년만의 경사였다. 연간무역 1조 달러! 이 숫자는 우리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2012년 6월 23일에는 당당히 ‘20-50 클럽’에 가입하였다. 일본ㆍ미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독일ㆍ영국에 이은 일곱 번째의 나라가 되었다. 여기 ‘20-50 클럽’이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충족하는 나라를 뜻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2012년 6월 23일에 1인당 국민소득 2만3,680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충족함으로써 이에 가입하였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頂上會議)를 개최하고, 그 의장국으로서 당당하게 세계무대(世界舞臺)의 중심에 서지 않았던가. 또, 2011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기구(DAC)에 가입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뀐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가(開發途上國家) 발전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한 것이다.
2016년, 건국 68주년을 맞아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많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의 개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과시하고,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후 3년간의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우리의 힘으로 건국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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