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조문국과 신라와의 전투에 대하여 다뤄보고자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일부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불신감으로 인해 사료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나 『신라사초(新羅史草)』라고 불리는 남당 박창화의 유고와 함께 구전으로 전해오는 설화도 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인 1926년 산운 주재소 하기시마 교요(荻島敎雄)라는 일본인이 쓴 『미광(微光)』과 1986년 박연회(朴淵會)의 『조문국지(召文國誌)에 신라와의 전투에 관해 쓴 글들이 있다. 행정을 하는데 『비교행정론』, 정치를 하는데 『비교국가론』을 읽어본다. 타지역, 다른 나라는 어떤가 상호 비교해보는 것이다. 조문국 패망에 대하여 주장하는 바를 상호 비교해보자. 조문국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145년(인종 23)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 조문국
185년(벌휴왕 2) 2월에 파진찬(波珍湌)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湌)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軍主)로 임명하여 조문국(召文國)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二月, 拜波珍湌仇道·一吉湌仇須兮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此.)
위 기사에 의하면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 제4 등인 파진찬 구도와 제7 등 일길찬 구수혜를 새롭게 창설한 군주에 임명한 것이다. 유사시에만 군대를 통솔하는 중앙의 임시 관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전시와 평시 구분 없이 직위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대체로 많다. 신라가 새 직제를 창설할 정도로 조문국의 국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문국을 공격하기에 앞서 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사면을 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본디 조문국(召文國)인데, 신라에서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의성부(義城府)로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의성은 예전 조문국의 도읍이었다.
1760년(영조 36)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전하는 조문국
금학성이 있어 성 중으로 세상에 전해오는 조문국의 왕이 피난하였다. 성을 겹겹 하게 포위하고 있으면, 성내에는 마침내 식량이 부족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쑥으로는 봉우리를 덮어 양곡이 쌓여있는 것 같이 위장하였으며, 물에는 흰 흙을 풀어 아래쪽으로 흘려서 보내니 하얀 쌀뜨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이처럼 먹을 것 넉넉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굳게 지켰다. 그래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칭한다.
在金鶴城中世傳召門國王入城 被圍稂乏以蒿覆峯有若糧穀積儲者然 又白土漬水下流噴白如米泔 以示足食固守之意以此稱露積峯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금성산은 군남 25리에 있는데 일명 금학산이라 하고 그 안에 노적봉이 있다.”라고 하였다.
양곡이 많은 것으로 위장하고 쌀뜨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위장하는 전술을 시행한 것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금성산에서 시도한 것이 처음 아닐까?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으로 알아보는 조문국
아달라기(阿達羅紀) 16년 정월에 조문국 묘덕왕이 죽었다. 홍봉(紅鳳), 벽해(碧海), 황운(黃雲), 난옥(暖玉), 보운(宝雲), 목단(牧丹), 초운(楚雲), 호와(好蛙) 8세주가 왕위를 다투었다. 나라 안에 대란이 일어났다. 여주(女主) 초운(楚雲, 운모의 모)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산을에게 명하여 선도(仙徒) 2,000명을 이끌고 반술과 함께 조문으로 들어가 난리를 평정하고, 초운의 아들 묘초(妙楚)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산을을 조문감국(監國)으로 하였다. … 조문 사람들이 받들어 묘왕(廟王)으로 삼았다. 세칭 을공(乙公)이란 사람은 이분이다.
7월 기록에 난리를 평정하게 된 경위와 신라와의 관계가 드러난다. … 8세주가 그 땅을 나누어 점거하고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재위가 33년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묘덕은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수차례 사신을 보내 입공하면서 신하라고 칭하였다. 조정에서는 조문국을 구국(舊國)이라고 하여 우대하였다. 이때 이르러 드디어 신라의 번(藩)으로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므로, 경(京)에 집을 하사하였다. 산을(山乙)은 이 공으로 작위가 각간(角干)에 나아갔다.
벌휴왕(伐休王) 2년 정월에 조문감국(召文監國) 산을이 76세로 죽었다. 조문 사람들이 신처럼 맏들어 을공사(乙公祠)를 세웠다.
2월에 조문 8세주가 경덕사주(景德祀主) 용운(龍雲, 묘초의 여동생)을 받들었다. 달문(達文, 아달라왕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벌휴는 비품(非品, 왕의 골품이 아님)으로 왕위를 훔쳤다.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 천하가 토벌하여야 옳다.”라고 하였다. …
소문세주는 모두 인척이다. 비록 미로에 있더라도 지도해야 옳은 것이지 … “욱보의 아들 구도는 조문국을 익숙하게 잘 알고 조문국의 인심을 얻었습니다. 비록 젊더라도 너그럽고 어지니,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팽구의 아들 구수혜는 공성전에 뛰어나므로 두 사람이 서로 한번 공격하고 한번 습격하면 곧 가히 지켜낼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이에 구도와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치도록 하였다. 구도는 구산(龜山)에서 동북으로, 구수혜는 아화옥(阿火屋) 대로로 곧바로 향하였다. 양군은 서로 완급을 조절하면서 공격하였다. 구도가 여무대(女巫隊)를 일으켜 관문을 지키는 자를 습격하고 그 도읍으로 직행하였다. 우을이 내응하는 난을 일으켜서 드디어 평정하였다. … 이해 7월에 우을(牛乙)을 경덕사주(景德祠主)로 하였으며, 벌휴왕 7년에 정월에 조문을 강주(剛州)로 하여, 우을을 태수로 삼았다.
이는 정사에서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다르다. 전쟁이 벌어진 원인은 조문국 내부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산을은 신라에서 조문국으로 들어온 자이다. 또한 우을은 그의 아들이다. 또한, 구산(오늘날의 의흥면)과 아화옥(비안면) 방면으로 동서 양쪽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당시의 지역 이름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소설로만 치부할 것은 아닐 듯하다.
1926년(대정 15) 하기시마 교요(荻島敎雄) 미광(微光)에서의 전쟁
신라 9세 벌휴왕이 등극하여 조문국이 비상(非常)히 세력을 얻어…
관리를 보내어 항복하라고 강요하니, 조문국왕은 군신과 모의하게 되었으나, 한 사람도 답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조문국이 적라국(현재의 군위)을 토벌한 후에 잘난체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 실력은 비어있을 터였다. 더불어 신라와는 강약의 차이가 현저한 까닭이다. 그러나 마침내 교전하기로 하고 신라 사자 2인을 참살하니, 신라왕은 더욱 크게 화를 내어 다음 해에 김장군이 2,000의 병사를 이끌고, 조문국을 진공하게 되었다. 조문국은 금성산에 둘레 9,100척, 높이 13척의 석성을 쌓고 왕이 머무르며 진두지휘하여 방어할 준비를 하였다.
신라 병은 가음방면으로 진공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반면에 조문은 성을 지키면서 전투에 임하니 신라의 강함으로도 쉽게 깨뜨리지 못하였다. 점차 성내에는 양식이 모자라게 되었다. 또한 신라군은 물러갈 조짐이 없었다. 이에 조문왕은 묘한 계책을 생각해냈다. 이는 성 중의 작은 산을 쑥으로 덮어 곡물을 저장한 듯이 적에게 보이고, 백토(흰흙)를 물에 뿌려 흘러 보내어 쌀뜨물 같이 보이게 하였다. 며칠간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으나 아무리 용사가 많다고 할지라도 배고픔도 있어서 하는 수가 없었다. 7일 동안 불꽃 같은 격전을 벌였으나 미경에는 패배를 면치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왕은 진두에서 김 장군과 악전고투하다가 기마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진퇴의 자유를 잃게 되었다. 김 장군이 검을 뽑아 조문왕의 머리를 베니 영고성쇠는 세상의 법칙이었다. 3대 100년간이나 융성하던 조문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일제강점기 고토 신베이(後藤新平)는 ‘문장적무비(文裝的武備)’라 하여 식민 통치의 요체로서 사회나 문화에 대한 조사를 주장하였다. 식민지 또는 적국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문을 가장한 무로써, 효과적 식민 통치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책 또한 문장적무비론(文裝的武備論)에 입각하였을 것이다. 임나 지방지와 귀수사에 대한 항목은 이러한 관점에서 삽입하였음을 인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위 내용 등은 그 당시에 들었던 것을 나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의 『원효대사』에서 조문국은 “대발병 30인 하였다는 작은 나라”라고 하는 이야기가 『미광』에서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누구에게서 들었던지 발병 인원이 동일하다.
1962년 7월 금성면 김세한(金世漢)의 제보에 의한 구전설화
금성면 수탄동(水彈洞, 수정리의 오류?) 김세한 씨의 제보로 채록한 구전설화이다. “조문국의 고적(古跡)”이란 제목으로 평민사에서 간행한 『한국 구전설화』에 실려 있는 이야기 그대로 전제하고자 한다.
의성군 금성면은 옛날 조문국이라는 나라으 서울이엿든 곳이다. 그때 신라국은 흥성하던 때인디 신라국은 이 조문국에 大兵(대병)으로 쳐들어 왔다. 조문국왕은 금성산 뒤쪽에 있는 대궐산에다 大闕(대궐)을 옮기고 버티었다. 금성산캉 비봉산 사이에 성을 겹겹이 쌓고 문은 어디메가 있는지 모리게 해 놔서 城門不在(성문부재)라 突入不可(돌입불가)로 해놨다. 북쪽에 있는 노적같은 산에는 짚섬으로 덮어서 멀리서 보문 마치 노적가리같이 뵈이게 해놨다.
신라군이 금성산 밑이까지 와서 공격해는디 조문국은 좀처리 공략할 수 없일 거 같어서 勝算(승산)이 없일 거 같어서 회군할라 캣다. 그때 군사 하나가 조문국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산꼭대기에는 물이 없일 팅께 수일(水日)밖이 몬 전딜티이 더 싸워보자 캤다. 신라군은 더 싸우기로 했는디 조문국 군은 산 꼭대기 수련장에 말을 많이 끌어내어 하얀 백미(白米)로 말등에 퍼부었다. 멀리서 보이 말을 물로 씨기는 걸로 보였다. 저렇게 높은 디에 물이 지리 많으이 좀처럼 항복하지 않겠나 카고 회군해서 갈라고 하는디 회군이 노적봉(露積峰) 동쪽으로 돌아감시 보이 노적봉은 노적가리가 아이고 산이고 거그는 강(江)도 없고 물도 없고 성(城)도 없고 금성산 대궐도 되어 있어서 그리서 쉬웁게 쳐들어갈 수 있어서 조문국은 처부서서 조문국은 신라영토가 댔다.
오늘날 대궐에 가보문 조문국 자리가 많이 남어 있다. 조문국왕의 왕좌와 문무백관의 자리도 있고 성 자리도 간간이 남어 있고 녹 쓴 화살촉 뚝배기 조각 사발 조각 지와장 조각 등이 마이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군주라 하는 새로운 직제를 편성하는 등 조문국 정벌을 위한 신라의 자세 등을 알 수가 있다. 조문국의 위세를 알 수가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전투 양상과 노적봉에 대한 직접적인 거론은 없어도 노적봉에서의 전투 양상을 보여준다. 이후의 구전되는 설화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남당 박창화의 유고와 일본인이 쓴 『미광(微光)』은 전쟁하게 된 동기, 그리고 동원된 전투 인원, 전투 이후 상황까지 자세하다. 구전설화의 틀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박연회의 『조문국지(召文國誌)』 등에서 조문국 패망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거론하는 데 있어 소재가 되었다.
조문국은 패망하였지만, 그 후손들은 간으로서 이 지역을 계속 통치하게 된다. 물론 신라에 있는 왕 중의 왕 마립간에게 구속받는 경우가 있겠지만, 국민들은 기존 지배자에게 통치를 받는 것이다. 또한 신라왕족과의 혼인관계로 신라의 인통이 되는 등 조문국의 후손들이 신라의 주축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 일성왕 10년 8월에 조문(召文)으로 들어와 원(院)을 세웠던 인물이다.
2) 산을과 을공은 동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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