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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 기후 차 크고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의성(금성산, 헌팅지 일대, 개일휴게소)

의성신문 2022. 9. 23. 10:07

가뭄이 심한 의성에 전해오는 기우제와 전설

 

팔도 관찰사에게 하서(下書)하였다.

근래 해마다 흉년들어 백성이 곡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올해의 가뭄은 전에 비하여 더욱 극심하여 두어 달이 넘게 가물어 곡식이 모두 말라버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참으로 두려운 마음 간절하다.

모든 사전(祀典)에 실린 바에 따라 기도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아직 한 번도 비가 오는 효과를 못 보았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면 비를 빌어 응답이 있는 곳으로는 다음과 같았다.

경기도에는 경상도에는 울산(蔚山)의 입암연(立岩淵영산(靈山)의 법사지(法師池성주(星州)의 대자암(大子岩선산(善山)의 이어연(鯉魚淵고성(固城)의 용수암(龍水岩의성(義城)혈동(穴洞)과 천암(穿岩밀양(密陽)의 구연(臼淵)이다. 이런 곳에는 소재지의 수령이 전물을 정하게 갖추어 각별히 지성으로 행제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1527.5.29-

금성산 정상에서 묘를 찾아 파헤치는 장면

전국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의성에만도 금성산 일대를 비롯해 천제봉, 둔덕산, 갈라산, 구무산, 해망산, 비봉산(다인) 등 많은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그중에서도 기우제를 지내 효과를 본 곳이 의성에 2곳이나 된다. 이는 비가 적게 오는 고장으로 더욱 간절히 바랐으므로 그럴 것이다.

 

영남분지는 신생대 중기 이후 지반운동으로 융기하면서 높고 낮음의 차이가 벌어졌다. 그 결과 생겨난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양 백()에 둘러싸인 채 우리나라에서 비가 적게 오는 영남분지가 되었다. 두 산맥에서 가지 친 보현과 팔공 산줄기와 그 산줄기에서 가지 친 작은 산줄기로 겹겹이 비그늘이 형성되었다. 의성 분지는 영남분지에서보다 더 비가 적게 오는 곳이다. 의성지역의 높은 곳은 중생대 백악기 화산 활동에 의해 지반이 융기한 결과이고, 안계 분지는 차별침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침식과 풍화에 강한 곳은 높은 산지로 약한 지역은 구릉지나 분지가 되는데,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인 낮고 평탄한 지형을 분지라고 말한다. 영남분지 안의 의성 분지 지역은 비가 가장 적게 오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특히 분지 지형으로 축온(蓄溫) 현상이 생겨 한서의 차이 또한 크다. 또한 여름날에는 맑게 갠 날이 많고, 기온이 높아 증발량이 많다. 반면에 화산지역으로 토양층이 얕아 수분을 유지하는 데 불리하였다.

 

가뭄으로 인한 피해는 타지역에 비해 심하였겠지만, 홍수로 인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북쪽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결절지로서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과 함께 삼한시대 조문국이라는 성읍국가가 도읍할 정도로 과거에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뭄이 심할 때,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조문국의 주산인 금성산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가뭄과 관련하여 얽혀진 전설도 있다. 산의 기운을 음양오행설에 따라 구분할 때 탑리리에서 바라보면 산의 형태가 마치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금산(金山)에 해당한다. 가마()의 뚜껑과도 닮은 이러한 산이 있는 지역에는 재물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7C 허모[許某] 현령을 대신하여 지은 금학산기우제문(金鶴山祈雨祭文, 금성산의 옛 이름)은 이민성[李民宬]의 경정집[敬亭集], 1771년 석당 김상정[金相定]이 현령으로 재직할 때 금성산에서 올린 기우제문은 그의 문집 석당유고[石堂遺稿]에 전해져 온다. 모두 비를 내려서 백성들의 근심을 담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금성산은 이러한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가뭄이 심할 적이면 기우제를 지내고는 하는데, 그 지내는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이곳 일대에 가뭄이 들면 수정리와 탑리 등의 부녀자들이 돌아가며 쌍계천에 키를 들고 나간다. 물로 키질을 한 뒤에 홑치마를 입고, 이곳 산정에 올라 분뇨를 뿌린 후에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자연의 생명을 위협하는 반감주술[反感呪術]의 형태가 아닌가.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주민들은 이 산을 파헤쳐 보고는 한다. 암산(巖山)의 경우에 흙이 있는 부분이 명당에 해당한다. 정상 부위에 흙이 있는 곳이 있는데, 움푹하니 패 있다. 과거에 흙을 파헤친 흔적이다.

1971년 간행한 유증선의 영남의 전설에 전해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이 산에 묘를 쓴다면 석 달 동안 이 산을 둘러싼 금성면은 비한 방울 안 내리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갑자기 운수가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조 고종 때 이 지방에 심한 한발이든 적이 있었다. 나라를 통 털어보아도 지방마다 비가 왔는데 이 지방만은 똑 빠뜨려 놓고 말았다. 그래서 논밭은 말라 곡식은 타들어 갔다.

농민들은 곡식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비를 바라다 지쳤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금성산을 파헤쳐라.”라고 외쳤다. 인근 동민 수백 명이 산정에 모였다. 이 산은 밖에서는 깍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으나 산상은 넓이 600평이나 되는 모래사장이다. 동민들이 사금을 찾듯이 뒤졌더니, 깊이 10m의 땅속에서 조그마한 석곽을 발견하였다. 동민들의 울분은 일시에 폭발하여 해골과 함께 산 아래로 팽개쳤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더니 함박으로 비는 쏟아졌다.

1967년 채록한 전설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0의성 전통 수리농업

헌팅지 일대의 수계체계와 헌팅지의 못종과 물넘이

의성지역은 비가 가장 적게 내리는 지역이자,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토양으로서 물이 쉽게 빠진다. 농업환경이 불리한 고장이다. 이러한 사실을 극복하고자 조문국 당시부터 수리시설을 만들어 농업에 이용하여 왔다. 금성산과 비봉산 두 개의 산은 말발굽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들 두 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주변 지역을 돌아보면 크고 작은 못이 100여 개나 된다.

특히, 금성산 서쪽 헌팅지일대 의성 전통 수리농업 시스템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심통, 윗수통과 아래 수통, 못종 등 기능별 전통 제언(堤堰) 기술들을 적용하였다. 맨 위의 수통부터 못종을 개방하여 위의 따뜻한 물이 공급되도록 과학적으로 설계하였으며, 한정된 물을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흐름과 지형에 따라 제언지를 선정하였다.

위마지(할아비 못)’에서 공급한 물이 논에 대고 남으면 헌탕웃지(아비 못)’에 담고, ‘헌탕웃지에서 공급한 물이 남으면 헌팅지에 다시 담았다. 벼를 재배하면서는 물을 일시에 공급하여 한날한시에 한전(旱田)에서 수전(水田)으로 바뀌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물을 절약하고자 못 도감 제도를 지금껏 유지하였다.

 

개일휴게소의 약수 이야기

과거 개일 휴게소 샤워장 흔적이 남은 건물과 시계탑, 그리고 준공기념비

의성읍에서 국도 28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40여 리를 향하면 왼쪽 아래 개일휴게소가 있다. 1982년 한해가 심할 때였다. 자연수가 솟아나는 것을 보고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개발하기로 하였다. 육군 2626부대의 암반 착정기로 시추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하 100m 지점에서부터 수맥을 발견하였으나, 50m 정도 더 내려가게 되었다.

개일 2동의 못에 농업용수를 담아 두었다가 농수를 따라 흘러보냄으로써 15ha의 수리 안전답이 생겨난 것이다. 농업용수로 개발하였으나, 주민 중에 무좀과 피부병이 나았다는 사람이 있어 수질을 검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희귀한 알칼리성 생약 수로써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다음 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던 당시에 12천만원을 지원받아 군청에서 농토를 매입하여 휴게소, 샤워장, 식수대, 식당, 주차장 등의 최신 시설을 마련하게 되었다. 약수도 마시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전국 최초의 국도변 휴게소일 듯싶다. 칼슘, 탄산, 수소, 알칼리, 황산, 이온의 함유량이 많아서 피부병은 물론 소화불량 등 만성 위장병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수많은 사람이 쉬어 갔다.

군에서 개발하여 직영하던 휴게소 건물은 이후로 입찰하게 되면서 한동안 식당으로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8인치 구경의 양수기로 하루 2,000의 물을 아끼지 않고 퍼낸 결과 지금은 지하수가 완전히 고갈되었다. 당시 건립한 기념비와 금성청년회의소가 세운 시계탑만이 남아 그 흔적을 오늘에 말하여 주고 있다.

 

기상이변에 대처하자

 

과거 가뭄이 들 때 비를 기원하는 농민의 마음은 간절하였다. 농민들 스스로 금성산 정상을 찾았다. 그러나 지하수 개발 등 좋은 조건을 갖춘 현대에 이르러서는 농업용수가 고갈될 정도로 풍족하게 사용하였다. 몽리민들끼리 돈을 내어 못 도감을 두고 관리하던 시절은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기상이변은 앞으로 지속될 것이다.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것인가? 물을 절약하고 또 절약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할 때 부족하더라도 근심·걱정 없이 물을 펑펑 퍼낼 것인가? 금성산 정상에도 가보고, 헌팅지에도 가보고, 개일휴게소도 한 번쯤 들러보면 어떨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기록에 1359(공민왕 2)에 심하게 흉년이 들어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 예부시랑(禮部侍郞) 전이도(全以道)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의성현(義城縣)을 순시할 때에 옛 둑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만일 이것을 더 수축하면 심한 가뭄이 들더라도 가히 물을 대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령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농사의 시기를 놓치게 만들었으므로, 라고 하였다. 의성은 이전부터 대제지 또는 순호지 등의 못이 축조되어 활용하고 있었던 고장이다.

 

여름이 되면 보에 담겨진 물이 더러워진다. ‘녹조라테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물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상류의 물이 깨끗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로 깨끗한 물을 얻으려고 다투기만 한다. 보를 털어버리자고 한다.

가뭄 들 때 농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물인데. 근본적 원인은 유입되는 물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류와 지천을 정비하자. 공극률 높은 돌 자갈을 깔아 미생물과 만나게 하자. 수질정화식물을 인위적으로 심자. 플라스틱이 유입되지 않도록 우수 유입 부에 쓰레기 채집망을 설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