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의성으로 들어서면서 맞이하는 북원사거리이다. 로터리를 지나 바로 앞에 보이는 914번 지방도를 따라 직진하면 된다. 5.6km쯤 지나자 제2구암교 너머로 의성요양병원이 보인다. 교량을 건너기 이전 왼쪽 명고길을 따라 2km쯤 지나면 큰 바위가 도로변에 있다.
길가에는 높이 10m, 넓이 5m 정도의 깎아 세운 듯 보이는 자연암(自然岩)이 있다. 무심하게 지나친다면 어디에서나 흔히 보이는 절벽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연경묘향탄산인 계하 성산 옥곡 암봉표(涎慶墓香炭山因 棨下城山玉谷巖封標)라고 새긴 글씨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희미해졌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달리는 차에서도 식별할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사연은 지존한 임금을 사랑했던 한 아가씨의 애처로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바위 글과 더불어 1932년 류상묵이 간행한 『의성지(義城誌)』 고적(古蹟) 조와 유증선 편저의 『영남의 전설』과 의성교육청 발행 『문소의 얼』, 의성군 발행 『의성의 전설』, 의성군지편찬위원회 발행 『의성군지』 등에 「연경묘 향탄암 봉표」, 「연경묘 봉표의 내력」, 「연경묘 봉표」라는 제목으로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대조를 통하여 그 내력을 알아보고자 한다.
바위 글에 담긴 이야기
延慶墓香(연경묘향)
炭山因(탄산인)
啓下城山玉谷(계하성산옥곡)
巖封標(암봉표)
가운데에 크게 새겨진 글이다. ‘연경묘에 쓸 숯과 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의 향탄산(香炭山)이므로 나무 벌채를 금한다는 의미로 바위에 표시해 두었다.’라는 것이다.
다음 왼쪽에 작게 쓴 글이다.
甲午 七月 日 奉審(갑오 칠월 일 봉심) 1834년 7월에 받들어 살핌.
墓監 臣 金昌祐(묘감 신 김창우)
監董 臣 李政在(감동 신 이정재)
監守 安大福(감수 안대복)
다음 오른쪽에 작게 쓴 글이다.
本墓 守衛軍 金○○(본묘 수위군 김○○) 묘를 지킨 군인 김○○
築洑○棏 金一本 曺典(축보○득 김일본 조전) 보를 쌓은 김일본 조전
享司 執吏 金宗休(향사 집리 김종휴) 제사를 지내는 아전 김종휴
勤書 風憲 朴尙允(근서 풍헌 박상윤) 글을 쓴 풍헌 박상윤
연경은 누구이며, ‘향탄산 암봉표’란 무슨 뜻일까? 연경묘는 ‘22살로 요절한 효명세자(1809~1830)와 신정왕후 조 씨의 합장릉’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아들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된다. 수릉(綏陵)이라는 칭호를 받기 이전에는 ‘연경묘’라고 하였다. ‘연경묘 향탄산인 암봉표(延慶墓 香炭山因 巖封標)’라는 말은 ‘연경묘에 사용할 숯을 생산하고자 지정한 향탄산(香炭山)이므로, 나무 벌채를 금하는 구역임을 바위에 표시해 두었다.’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경주의 불령봉표(佛領封標), 시령봉표(枾嶺封標), 수렴봉표(水念封標)와 대구의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 표석, 수릉향탄금계(綏陵香炭禁香炭) 표석 등 대구·경북지역에 연경묘와 관련한 봉표가 많다. 대구의 표석은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다.
『의성지(義城誌)』 고적(古蹟) 조에 실려있는 이야기
연경묘향탄산암봉표(延慶墓香炭山巖封標)는 점곡면 옥곡에 있다. 연경은 세종대왕의 딸이다. 옥곡(玉谷)에 기생(妓生) 취란(翠蘭)이가 있으니 용모가 미려(美麗)하고 문사(文詞)가 담부(膽富)하며 서화(書畵)에 능한지라 당시 관에서 서울(京師)에 천거하야 약방에 종사케 되었다.
세종께 총애(寵愛)를 입어(蒙) 아들 연경을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란이는 연경을 데리고 옥곡촌에 부모님을 만나 뵈러 왔다가 연경이는 4살 때 죽고 취란이는 이로 인해 서울 길이 많아졌다.
연경묘를 수호하기 위하여 성산 옥곡을 계하하고 입묘시(入墓時) 시신 이정재가 감동(監董)하여 암봉표를 세우고, 그 오른쪽 바위에는 묘사비를 새겼다. 이는 김종휴가 쓴 글이다. 이와 관계된 서류가 년전까지 있다가 이인성(李寅聲,1905∼1907.4.27.) 군수 때에 어떻게 되었는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지금 푸른 이끼가 덮인 속에 자획이 겨우 있을 뿐이다.
『영남의 전설(嶺南의 傳說)』에 실려있는 이야기
의성군 점곡면 옥곡동(玉谷洞) 앞을 지나는 대로를 따라 북으로 1km 쯤 가면 바로 한길 옆에 높이 10m, 폭이 5m가 넘는 큼직한 자연암(自然岩)이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아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기이하매 처음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곁에 가까이 가보면 연경묘 향탄암 봉표(涎慶墓香炭岩巖封標)라고 굵직하게 새겨져 있다. 보는 이는 선뜻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치 못하고 발길을 돌리지마는 그 사연을 듣고 보면 눈물을 금키 어렵다.
연경은 이조 세종대왕의 아드님이다. 옥곡(玉谷)에 취란(翠蘭)이란 처녀가 있어 절세미인에 시문(時文)과 서화(書畵)에 뛰어난 재원이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서울에서 취란이를 궁중에 천거한즉 약방의 사동으로 종사케 하였다.
당시 세종대왕께서 용모는 꽃 같고 모든 일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처사에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을 보시고 그만 취란이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 많은 궁녀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취란이 혼자 대왕의 총애를 독점하게 된 것은 취란으로서는 무상의 영광이었다. 어느덧 1년이란 세월이 꿈속에 흘러갔다. 그리고 왕자 연경을 낳게 되자 온 궁중은 질투·시기로 들끓었다. 사랑도 죄이런가? 취란이는 드디어 궁중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 밤이 새도록 대왕마마 앞에서 슬픔에 잠겨 몸부림치다가 하는 수 없이 연경을 데리고 이 옥곡에 귀근하였다.
그후 취란은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서울 소식인가? 까치만 울어도 서울 소식인가? 조바심과 애태움 속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1년, 2년, … 4년, 그러나 귀궁(歸宮)의 소식은 커녕 왕자 문후신(問候臣) 조차 끊어졌다. 연경은 아바마마의 사랑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못본채 나이 4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로부터 취란은 영영 서울 길이 막혀졌다. 연경묘를 수호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성산 옥곡(城山玉谷)을 계하(啓下)하고 입묘(立墓) 때 시신 이정재(李政在)가 감동(監董)하여 향탄암 바위에 봉표를 새기고 오른편 바위에다가 묘사비(墓史碑)를 새겨 사람들에게 무엇을 애소하는 듯 보인다.
『일성록(日省錄))』 1834년(순조 34) 9월 19일 기사
命義城鎭川等邑所在閑曠地 劃付延慶墓香炭位土 禮曹啓言 延慶墓香炭位土 以延安米山面等地 辛卯九月劃屬墓所 而壬癸兩年潦水盡爲汰覆 收稅無路 方求代土之際 慶尙道義城點谷龜山面後坪 公忠道鎭川萬升面寺洞等地 有量外加耕及可合起墾處 自墓所詳探報來關問各該道矣 望定處長廣尺數四標里數 自本邑區別報來 似此閑曠等地 劃付墓所 許民耕食收稅補用 實合便宜量外加耕 則自今秋爲始收稅 未起墾處 隨起收稅 以補香炭需用之意 請分付各該道臣 允之 |
제목 : 의성 진천 등의 읍에 있는 한광지(閑曠地, 놀리는 땅)를 연경묘의 제사 위토지로 획부(劃付) 하도록 명 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연경묘의 제사를 위한 위토로 연안 미산면 등의 땅을 신묘년 9월에 묘소에 획속하였으나, 임, 계 양년에 큰물이 져서 모조리 묻히고 덮여서 세금을 거둘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신할 만한 땅을 구할 즈음에 경상도 의성의 점곡, 구산면 후평 땅과 공충도(현재의 충청도) 진천 만승면 사동 등지에 양외가경(量外加耕, 정해진 분량 외에 더 경작하는 것)한 곳과 개간하기에 적합한 곳이 있었습니다. 묘소로부터 상세히 탐문한 보고가 각각의 해당 도에 공문으로 왔습니다. 바라옵건대 장소를 정하여 길이와 넓이, 척수, 사방 표지와 거리 등에 대해 본 읍으로부터 구별하여 보고를 올리도록 한 뒤, 이 한광지를 묘소에 획부하고, 백성들이 농사지어 먹게 하면서 세금을 걷어 비용에 보충하도록 허락한다면 실로 편리할 것 같습니다. 양외가경에 대해서는 올해 가을부터 세금 걷는 것을 시작하고, 아직 개간하지 않은 곳은 개간하는 데 따라 세금을 거두어 제사에 필요한 경비에 보태도록 하는 뜻으로 각 해당 도신에게 분부하도록 요청합니다. 윤허 하다.
전설과 기사 그리고 봉표를 살펴보고서
바위 글과 『일성록(日省錄)』에 전해 오는 내용은 전설과 다르다. 두 곳의 연경묘는 순조의 적장자인 효명세자의 묘를 말하고 있다. 순조실록에 나오는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나서 풍양 조만영의 딸과 결혼했다가 1830년에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반면 전설 속의 연경묘는 세종대왕의 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성지(義城誌)』 뒷부분에 기록된 ‘이와 관계된 서류가 연전까지 있다가 이인성(李寅聲, 1905∼1907.4.27.) 군수 때에 어떻게 되었는지 잃어버리게 되었다.’라는 것은 효명세자에 대한 서류를 말하고 있다. 전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연경묘에서 수릉(綏陵)으로 바뀌기 이전 갑오년은 1834년이다. 『일성록』 기사와 일치하고 있다. 의성지 뒷부분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전설과는 거의 400년 정도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국가의 토지를 관리하면서, 분급하거나 위토로 지정하는데 전혀 근거가 없이 국유화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같은 용도로 활용된 적이 있었기에 차후에 재지정되지 않았을까? 전설과의 관련성을 애써 연결 지어 본다. 바위 글이 훼손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최신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성화이바 의성공장 준공식 개최 (0) | 2022.07.22 |
---|---|
‘청년 로그인 의성’ 1기 성황리 종료 (0) | 2022.07.22 |
의성조문국박물관 물놀이장 운영 (0) | 2022.07.22 |
‘농촌집 고쳐주기’ 사회공헌활동 (0) | 2022.07.22 |
경북도 여름축제가 COOL하게 뜬다 (0) | 2022.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