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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2호 향토사 이야기-대감마을 산운마을의 사당(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의성신문 2022. 6. 24. 10:07

산운 윗마을의 학록정사 뒤편에 광덕사가 있다                    운곡당에 있는 사당. 뒤편으로 금성산이 보인다.
자암종택 내부의 사당                                                        경정종택 내부의 사당
      금성산 아래에 유초각이 있다                                           산운마을 오른쪽 아래에 산운생태공원이 있다

필자의 신분 중의 하나는 향교의 장의 이다. 그러니 유교 이념을 전파하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하나의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러면 무얼 소개할 것인가? 대감마을로 불리는 산운마을의 사당을 선택했다. 과거 전통 시대에 종택 사당이란 생명이 처음 시작한 근본을 돌이켜 보고 근본에 보답하며(報本反始), 조상을 존중하고 종가를 공경하는 뜻(尊祖敬宗)이니, 실로 집안이란 명분을 지켜 가업을 열고 대대로 전수하는(開業傳世) 근본이라며 아주 중요시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종가에선 상상하기 힘든 시대의 변화상에 맞춘 불천위 제사 풍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 산운마을의 골목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산운마을에 있는 불천위 사당

일반적으로 신주(神主)4대손까지 사당에 모시다가 무덤에 묻는다, 제사도 고조(高祖)까지 4대를 봉사하게 되어 있다. 그 윗대는 시제(時祭) 때에만 모신다. 그러나 불천위는 신주를 옮기거나 무덤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이다.

옮기지 않는 신위라는 뜻의 불천위(不遷位)에도 등급이 있다.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도불천위(道不遷位), 문중에서 뜻을 모은 문중불천위(門中不遷位)로 구분된다.

의성의 불천위로는 12분이 있다. 의성읍 도동리에 어명으로 불천위를 허락받은 회당 신원록과 상리리의 효사제 이탁영, 점곡면 사촌리의 만취당 김사원과 천사 김종덕, 금성면 산운리 학록정사(鶴麓精舍)의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 1570~1629),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1573~1649) 삼부자,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1768~1849), 봉양면 구미리의 오봉 신지제, 구천면 용사리의 장시규와 그의 아들 장한상 장군 등이 있다.

영천이씨 집성촌인 산운마을의 입향시조는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바 있는 학동 이광준이다. 그의 아들인 경정 이민성과 자암 이민환 두 형제를 포함한 삼부자의 불천위가 학록정사 안 광덕사(光德祠)에 합사되어 있다. 운곡당을 건립한 운곡 이희발이 학문을 닦던 수정리 용문정 옆에는 공의 하사(下賜) 도상(圖像)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유초각(惟肖閣)이 있다. 경정, 자암 두 형제의 종택 일부가 6·25 당시 불에 타 두 분의 위패는 광덕사로 이봉하였다. 하지만 운곡당(雲谷堂)과 경정종택(敬亭宗宅), 자암종택(紫巖宗宅)에는 이전 사당이 아직 남아 있다. 제사 공간이 5곳에 이르는 것이다. 지역에서 효와 조상숭배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마을이라 할 것이다.

좋은 집터를 잡아 집을 짓게 된다. 그럴 때이면 종가댁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을 별도로 구획한다. 살림집을 짓기 전 산천경개(山川景槪)가 제일 먼저 스며드는 아늑하고 깊은 곳에 가묘(家廟)를 우선 지었다. 주자학(朱子學)의 영향으로 가묘를 짓는 것이 보편화가 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이다. 의식을 행할 때는 생존할 때와 똑같은 정성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예()를 갖추었다. 가묘는 유교의 효 사상과 조상숭배의 사상을 보여주는 시대적인 유산이며, 가족과 가정의 결속과 뿌리를 지탱해 주는 정신적 공간이었다.

 

가묘에서 지내는 예로는,

1. 신알례(晨謁禮) : 매일 새벽 문안을 드리는 의식.

2. 출입례(出入禮) : 먼 여행에 오를 때와 다녀와서 무사 귀가를 알리는 의식.

3. 고유제(告由祭) : 집 안에 큰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마치고 나서 보고 하는 의식.

4. 삼 례(三 禮) : 매월 초하루와 보름, 추석, 정초(), 동지절에 행하는 의식.

5. 청신례(淸新禮) : 일 년 절기 중 한식이나 청명 절기에 예를 갖추는 의식 등이 있다.

 

산운마을의 불천위 삼부자와 운곡 이희발은 어떤 사람인가? 1984년 영남일보에 연재된 영남학맥(嶺南學脈)이란 기사에서는 이민성과 이민환 형제를 의성에 문풍(文風)을 진작한 주역으로 보았으며, 이희발을 소개하면서는 학동 이광준의 손자까지 학자 집안으로 6명이 과거에 급제하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학동 이광준 집안사람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학문과 절의로 집안을 빛내고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또한 명청 교체기 나라 밖에서 남긴 책중일록(柵中日錄)과 만주 지방 땅의 생김새와 여진족의 풍습과 청군의 허실 등을 기록한 뒤 그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국방 강화의 실천 내용을 담은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은 민족사에 큰 업적이다. 형조판서를 지낸 운곡 이희발은 홍제전서의 편찬에 기여하였다.

산운마을의 불천위 제사는 6·25전쟁이 끝난 1950년 중반부터 기일에 맞추어 지내지 않는다. 광덕사에서 공동으로 매년 4월 첫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로 날짜를 정해 향사 형식으로 지내고 있다. 가을에 지내는 묘사는 봉양면에 있는 학동과 경정의 묘사는 101일에, 영양 하풍에 있는 자암의 묘사는 105일에 지낸다.

향사와 묘사는 종가보다도 영천이씨 학동 종회에서 준비하고 종손과 종부가 참여하는 혁신적인 형식으로 진행한다. 제사 장보기, 제사 음식 준비하기, 제례의 절차와 방법 등은 종친회에서 각각의 유사에게 맡겨서 집행한다.

제사 며칠 전부터 종친회를 중심으로 의성장에서 제사 물품을 준비하고, 학록정사에서 종손과 종부, 종친들과 그 부인들이 협동하여 각자 특기에 맞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혈육의 돈독한 정을 나눴다. 제사와 음식 준비에만 10여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종손과 종부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제례가 진행된다.

여성의 일방적인 노동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제사의 부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제사의 부담을 종손에게 완전히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추모하는 자손을 중심으로 참여하면서 업무를 분장하는 민주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과 절차에 참고할 만하다.

과거에 이러한 예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최제우에 이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1898)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강조한 바 있다. 향벽설위(向壁設位)를 뒤집은 것이다. 벽을, 죽은 자를, 과거를, 수직적인 시간(진화론)을 향해 밥을 차려놓고서 절하는 제사를 뒤바꾸자는 것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기존 방식과 달리하면 되는 것이다. 제사를 살아있는 자들의 친목과 우애를 위한 공간으로 본 것인데, 제사의 효용이 어찌 돌아가신 분만을 위한 것일까?

옥녀사(玉女辭)를 노래한 양산(讓山) 이태능(李泰能)(1887~1961)공이 19583월에 건립한 유초각(惟肖閣) 상량문에 남긴 글에는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백고조 회정공 운곡 선생은 들어가면 효도하고 우애하고 라 하였다. 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이 더 중할 것이다.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골목과 담 그리고 고샅 풍경

한옥마을을 탐방하는 사람들은 집들의 모양새, 규모 등을 따져보면서 한바퀴씩 둘러보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산운마을에 왔었던 탐방객들이 남긴 후기를 읽어보면 문이 잠겨있어 고택을 살펴보지 못하여 아쉬웠다는 사례를 많이 봤다.

문화해설 신청으로 해설과 함께 내부까지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학록정사를 비롯한 많은 고택과 초가 그리고 골목과 담장을 구경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샅 풍경을 중심으로 마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예전 6·25 이후 마을 사진이라며 산운마을 항공사진을 내게 보여준 분이 있었다. 그 기억에 의하면 최소한 골목은 지금까지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걸어서 동네 한 바퀴를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규모이다. 먼저 학록정사에 들르게 된다.

산운은 북쪽의 금학산(현재의 금성산)과 남쪽의 창이들 들판 사이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입향조 학동 이광준(15311609)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영조 26(1750) 지은 건물이 시도 유형문화재 학록정사(鶴麓精舍)인데, 소시문(蘇始門)과 함께 저 멀리 금성산이 보인다. 입향할 당시 금성산 아래 수정 계곡에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리(山雲里)라 이름하며, 이거 하기로 결심하게끔 만든 구름이다.

강당 대청 위를 보니 왼쪽에는 인에 거쳐하고(居仁)’, 오른쪽에는 의를 따를 것(由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더불어 살아가고, 항상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이는 삼부자로부터 이어진 영천이씨 집성촌의 좌우명과 같은 말일 터이다.

학록정사를 벗어나 오른쪽 뒷면으로 열린 길로 산운마을로 들어선다. 산운마을의 윗마을에서는 국가 민속문화재 소우당 고택(素宇堂 古宅)을 제일 처음 만난다. 이어 시도 민속문화재 운곡당(雲谷堂)과 점우당(漸于堂) 그리고 자암종택(紫巖宗宅)이 있다. 아래 동네에는 마을의 큰집이라 할 경정종택(敬亭宗宅)이 있다. 유초각은 용문정과 함께 수정리에 있다.

산운마을에는 이들을 포함해 30여 채 넘는 고가옥이 있다. 그중 산운의 윗마을은 황토 골목길로 가지런한 담장과 함께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고건축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황톳길과 흙담 그리고 담쟁이넝쿨과 함께하는 정겨움이 있다. 주인의 살림살이나 신분에 알맞게 흙이나 돌, 기와 쪽이나 나무 등을 다듬어 쌓아 단장한 토담, 돌각담이 있는 고샅 풍경에서 재물이나 가족과 자신의 평안을 기원하던 조상들의 심성을 잠시 엿볼 수 있다.

운곡당을 비롯한 고택에는 학자수인 회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다. 특히 도로변의 아랫마을 경정종택 입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00년의 회나무가 있다. 베어지지 않은 회나무만 해도 곳곳에 있다. 마을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회나무는 집안에 급제자가 생기거나 벼슬을 하게 되면 집 주위에 심던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있는 소우당 마당과 별당의 연못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소우당 마당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우당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마당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없다. 왜냐하면, ㅁ자 형태의 마당에 나무()를 심는다면 곤()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나무를 심으면 안채에서 사랑채가 바라보이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별당(別堂)의 연못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좌측 협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안채의 서쪽에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 사랑채 또는 별당(別堂)으로 불리는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우리나라 지도를 응용하여 조성하였다는 연못이 있다. 출수구는 남측 담장 밑에 있다. 그러나 집수구가 없다. 따라서 과거에는 물을 길어서 채웠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다 연못을 조성하는 이유는 일본에서는 물 빠짐을 위해, 중국에서는 물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는 물이 빠지는 것과 재물이 축나는 것을 동일시하여 꺼려하였다. 물을 길어서라도 연못의 물을 굳이 채우고자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