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이야기
글/사진. 안종화
68년간 쓴 일기의 산실 백운동 별업(別業)
(구천면 청산리 407번지 밤바위)
소보안계로(923번 지방도) 따라 소보 방면으로 향한다. 이어 울고개 지나서 조성지 방면의 청산 2길로 들어선다. 입구의 옛 청산초등학교를 지난 150m 지점에 큰 바위(사진)가 있다. 이 바위를 마을에서는 쌍바위 또는 밤바위(栗岩)라 한다.
백운동문(白雲洞門)이란 글자가 크게 음각된 밤바위 부근은 조선 후기의 무관 노상추(盧尙樞, 1746년~1829년)가 1823년 백운동으로 옮겨와 1829년 9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만년을 지낸 화체당(華棣堂) 자리이다. 바위 앞의 글도 공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밤바위가 있는 청산동은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1986.12.23. 공포)로 구미시 도개면에서 편입된 지역이다. 지난 호에 ‘의성의 지명유래’에 대한 연재를 하면서 행정구역 변천에 관한 내용도 실었다.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의성지역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아니한 명소라 생각되어 밤바위를 찾아도 보고 관련 인물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선 조선 시대 주인공이 머물럿던 청산동의 지리적인 배경과 노상추가 쓴 일기가 지닌 가치와 내용을 살펴보자. 의성신문사 주최 “2021년 의성군민 독서 감상문대회”와 같은 맥락에 일기 쓰기를 생활화하는 데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1813년 가덕첨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한 노상추가 69세 되던 1814년 개척한 백운동의 현재 행정 명칭은 의성군 구천면 청산1리이다. 이곳은 청화산(700.7m)의 정상 북쪽 기슭을 따라 형성된 곳이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으로는 앞이 트인 전형적인 분지형 계곡 마을이다. 노상추가 별업을 조성할 당시 백운동 일대 마을 이름은 각각 백운동(청산1리), 청운동(청산2리), 조성동(조성리), 국수동(장국2리) 이었다.
백운동 일대는 조선 시대까지 의성군 단독 관할이 아니었다. 백운동과 청운동은 선산부 관할이었다. 그리고 국수동은 상주목, 조성동과 신촌은 비안현 관할이었다. 가까운 비안현이 관장한다면 행정 효율이 높았겠지만, 마을이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행정구역을 넓히고자 월경지(越境地)를 차지한 까닭이다.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가뭄이 절정이던 1814년 7월 중순(양력), 백운동의 주민 손도살이 그를 찾아와 국수골 찬물내기 샘의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진정서(所志)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순조 14년 5월 28일 일기 내용으로 살펴본 진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운동 상류에 물이 솟는 곳이 2곳 있다. 화산으로부터 나오니 선산의 물이다. 하지만 국사동에 사는 사람들이 상류에 살고 있으니, 즉 상주 땅이다. 청운동에 있으니 선산 땅인데……. 선산의 물을 가지고.... 상주 사람들이 위에서 물을 빼앗아 홀로 물을 이용한다. 선산 사람들은 물을 빼앗겨 그 혜택을 입지 못하는 까닭에 관아에 소지를 올리니 관에서 병교(兵校)를 보내어 간사함을 잡아내시기 바란다.
노상추는 68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온 『노상추 일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일기 쓰기는 6대조 노경필의 아우 노경임으로부터 이어져 온 집안의 전통이었다. 아버지 노철로부터 17세가 되던 해인 영조 38년(1762)부터 물려받아 가족사와 함께 관료 생활에 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후기 집안과 향촌의 대소사 그리고 관료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 등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더구나 무인으로서 일기를 쓴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5년 한국사료총서 사업의 일환으로 『노상추 일기』를 4권의 책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2017년부터 매년 3권씩 국역 발간하여 올해 12권의 『국역 노상추 일기』를 완간하게 되었다.
『노상추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회보와 동 위원회에서 발간한 『역사의 창』에 수차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일기 내용을 담은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등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일기로 본 조선』 등은 다른 이들의 일기와 함께 노상추의 일기를 소개하고 있다. 백운동 별업 조성과 경영 등 노상추 관련 논문과 글도 여러 곳에 실리는 등 『노상추 일기』가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상추는 23세 되던 어느 날 일기에 “붓을 던지기로 뜻을 정하고 비로소 무예를 시작한다.”라고 적었다. 양반으로서의 이상인 문관을 꿈꾸다가 현실적으로 조부의 발자취를 좇아 무과에 응시하기로 뜻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35세가 되던 1780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12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관직을 얻기까지는 40세가 되는 1785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1786년에 효력부위무신겸 수문장(效力副尉武臣兼守門將)을 지냈고, 1789년에는 훈련원 주부, 1791년에는 오위장, 1793년에는 삭주부사, 1801년에는 홍주목사, 1811년에는 가덕진 절제사 등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한양에서 내금위 금군(禁軍)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함경도와 평안도 변방과 천주교인들이 많았던 충청도 등지에서 관료로서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일기에 당시의 시대상을 풍성하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관직 생활 중 겪은 일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 1793년 8월 12일 왕실 호위를 담당하던 노상추는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2곳에 가서 제수품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잡인들이 출입하지는 않는지, 절차는 엄격한지를 살펴보라는 정조의 밀명을 받아 수행하였다. 1794년 9월 3일에는 기생의 머리를 올려준 일이 있었으며, 1798년 4월에는 양반집 며느리와 평민 남자가 바람난 일이 있었다. 1800년 12월 천주교도들과 관련한 일들을 비롯하여 무관으로서 체험하였던 일 그리고 전국을 다니며 보았던 풍물과 생활상도 꼼꼼히 기록하였다.
가족과 향촌 사회에서의 일어났던 일들도 살펴보자. 인적 교류를 위하여 인사하고, 편지 쓰고, 경조사와 각종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기록하였다. 방문한 곳이나 본인을 방문했던 사람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 문상을 오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무과에 합격하고 인사차 친지와 이웃들에 들르면서 그냥 지나친 일도 있었다. 누이의 혼례 과정은 당시의 혼인풍습을 알게 해준다. 족보에서 서(庶)자를 빼는 사건이 있었으며, 출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사별하고 3번이나 혼례를 치르게 된다. 산림 남벌로 토양의 유실, 토지 생산성 저하와 같은 문제에 노출되어 있던 청화산, 냉산을 가꾸어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봉산(封山) 지정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도 있었다. 순조 26년(1826) 5월 8일 일기를 들여다보자.
관아에 볼일이 있어서 비가 내리기 전에 출발하였다. 용산진의 배가 강창진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월파 참막으로 가니, 비가 남쪽에서 오기 시작하였다. 비를 맞으면서 나루를 건너 선산부에 들어가 작청에 앉아서 화산(華山)과 냉산(冷山)을 봉산(封山)으로 정하는 사안을 감영에 보고한 것에 관해 물었다. 감사의 처분에 ‘상주·비안·군위 세 고을에 문서를 보낸 뒤에 절목에 인신을 찍어서 내려보내겠다. 그리고 다시 보고가 들어오면 인신을 찍어서 내려보낼 것이니 우선은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세 고을에 문서를 보내자 회답 문서가 일제히 도착했으므로 이번에 다시 보고했다고 한다. 고을 수령은 설사 증세 때문에 나를 접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예방 서리를 시켜 전갈을 보내고, 요기할 음식상을 내보내 주었다. 관아에서 나와서 문동(文洞)으로 돌아왔다가 비가 잦아든 뒤에 나루를 건너 서산와(西山窩)로 돌아오니, 날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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