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뜻밖의 횡재(橫財)는 횡재(橫災)로 통한다

의성신문 2007. 3. 28. 03:39
 

횡재(橫財)는 횡재(橫災)라고 유언한 어머니


수레를 만드는 장인은 사람들이 부자 되기를 바라며 관을 만드는 목수는 사람들이 많이 죽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고 수레를 만드는 장인이 모두 착하고 관을 만드는 목수가 모두 악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을 팔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장인과 목수는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랄뿐이지 두 사람의 선과 악을 가름하는 잣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조의 철종(哲宗) 당시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높은 벼슬을 고루 역임한 김학성(金學性)이라는 문신(文臣)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가난하게 서당공부를 하였다. 김학성이 어릴 당시 봄철의 어느 날 밤비가 구성지게 내리고 처마 끝 낙수 물소리가 장구를 울리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상한 소리의 그곳을 찾아 땅을 파고 보았더니 뚜껑이 닫혀진 솥이 묻혀 있었고 솥 안에는 금은보화가 가득차 있었다. 이는 난리 때 묻어놓고 피난 가서 죽은 전주인의 재물일 것이다.

과부 어머니는 이를 남몰래 그대로 다시 묻고 이사를 해 버렸다. 후일 자식을 잘 키워 성공한 후에 유복하게 살다가 임종(臨終)에 즈음하여 자식에게 말하기를 뜻밖의 횡재(橫財)는 횡재(橫災)로 통한다. 곧 분수 밖의 재물은 재화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하고 그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정말로 맹자의 어머니 못지않게 착한 마음으로 자식을 가르쳤고,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업보를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지만 아침나절에 오후의 행복과 불행을 점치지 못한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뒤를 보고 잠이 오면 자면서 그대로 살아간다. 한걸음 내디디면 한걸음 없어지고, 또 한걸음 내디디면 또 한걸음 없어진다. 뒤로한 그 발자국을 아쉬워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노자(老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물 같은 삶을 으뜸으로 여겼다. 흐르는 물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흐르다가 막히면 돌아서 가고 웅덩이에 갇히면 채운 후에 넘쳐흐른다. 빨리 간다고 과시하지도 않고 뒤져간다고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 같은 삶을 바보 멍청이 천치 같은 삶이라고 하며, 흐르는 물을 잡아두고 거스르려고 한다. 재물을 쌓고 자리를 다투고 욕망을 따라 좌지우지되기를 고집한다. 윗고의 논이 말라도 아릇고의 내 논에 물을 대면 이치에 맞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이다. 물은 빈자리를 매우면서 뒷물이 앞 물을 밀고 흘러간 만큼 흘러들어온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기를 원하는 재력도 권력도 명예도 가장 소중한 건강까지도 물의 이치와 같을 것이다.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또 비워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보름에 가득 찬 달이 그름이면 없어지고 초승에 다시 생기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붕당(朋黨)을 이루며 산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가 사색당파 때문에 망했다고 옛날 정치인을 비판한다. 요즘 정치인은 어떤가 더욱 심하다. 옛날에도 붕당은 있었다. 중국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는 붕당론(朋黨論)이란 글을 지어 나라에 올렸다.

여기에 옮겨 적는다.

“대저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하여 벗이 되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여 벗이 되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건대 소인은 벗이 없고 군자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째서인가 소인은 좋아하는 것이 이(利)와 록(祿)이요. 탐하는 것이 재물입니다. 이익을 함께할 때 잠시 무리를 만들어 서로 끌어들여서 붕당을 짓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익이 눈앞에 있을 때 앞을 다투고, 그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소원해져서 심한 자는 도리어 서로 해쳐 비록 형제와 친척간이라도 서로 사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소인은 벗이 없으며, 잠시 벗을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군자인즉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요 행하는 바가 충신이요, 아끼는 바가 명절(名節)입니다. 이로써 몸을 수양하고 도를 함께하여 서로 유익하고 이로서 나라를 섬기면 마음이 함께하여 서로 이루어지고 시종여일 하니 이것이 군자의 벗입니다. 그러므로 나랏님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 벗을 물리치고 군장의 참된 벗을 나라에 등용한다면 나라는 곧 다스려질 것입니다.”하고 설파하였다.

정치인들은 옛날의 당쟁사를 돌아보고 나라를 망치는 장본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인들은 오히려 구양수가 설파한 소인의 무리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잘 아는 조선조의 위대한 정치인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은 정치의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사약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형벌과 귀양을 감수하고 멸문의 화를 입어도 절의와 명분을 지키면서 의연히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요즘 철새라는 유행어는 현대 정치인을 두고 한말이다. 세력이 흥성할까 쇠퇴할까 바람 끝이 어느 방향으로 지는가를 살피다가 이리저리 이합집산 하니 이것이야말로 이념이나 지조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진 자신의 정치생명 유지에만 급급하면서 어제까지 충성으로 집을 지키던 개가 돌아서서 주인의 발꿈치를 무는 격과 무엇이 다르랴.

꿀벌은 군신(君臣)의 의리를 지키며 늑대는 부자(父子)의 친함이 있으며, 원앙은 부부(夫婦)의 분별이 있으며 기러기는 장유(長幼)의 차례가 있으며, 승냥이는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모두들 아름다운 말들이다.



글 / 김창회(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