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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의 재조명>

의성신문 2007. 2. 9. 23:32
 

<향토문화의 재조명>


의성현(義城縣)의 禹氏烈女에 대한

기록을 남긴 신덕함 공(申德涵 公)



강상문 (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7세기 후반 경상도 의성현에 살았던 우소사(禹召史)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긴 분은 신덕함 공이다.

아주신씨 세계(世系)에 의하면 16세(世) 신덕함 공은 효종 7년(1656) 5월에 父 신휴석(申休錫) 공과 母 풍산홍씨 사이에 장남으로 의성현 금성면 수정리에서 태어나 영조 6년(1730) 75세의 나이로 卒하였다. 본관은 아주이고 字는 중유(仲游)이며 호는 농음(聾瘖)이다.

  공은 숙종 10년(1684) 28세 때 生進兩試에 모두 합격했으나 문과시험에는 계속 실패함으로써 결국 벼슬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좌절하여 스스로 호를 聾瘖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장력이 뛰어났음은 그의 친구들이 모두 인정하였다. 『禹烈女傳』을 보면 그가 중국고사, 詩傳 등에 매우 밝았으며 문장력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천성이 孝友하였으며, 17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居喪執禮가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얼굴에 어그러짐이 없었고 나이 들어서도 끝내 해이한 빛이 없었다. 남양홍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學模, 聖模)을 두었다.

공의 가계는 조상 대대로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을 해왔으나 본인은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효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즉 5세(世) 申祐와 11세(世) 申元祿의 경우는 효자로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부친 신휴석도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신씨 가문의 이러한 효행의식이 신덕함의 『禹烈女傳』 집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慶尙道邑誌』의성현 인물조를 보면 모두 54명(고려 13명, 조선 41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신덕함 가계의 인물로서 모두 10명이나 수록되어 있다. 申元祿(祐 후손), 申之悌(祐 후손), 申達道(元祿의 孫子), 申悅道(達道의 아우), 申弘望(之悌의 子), 申圭(達道의 子), 申適道(효자 元祿의 孫子), 申在(修撰 達道의 아들), 申瑠, 申濂(修撰 達道의 曾孫)이 그들이다. 그리고 효자조에 신원록, 신휴석이 실려 있다. 따라서 신덕함의 집안 인물이 읍지에 많이 등장함으로써 의성현에서의 아주신씨의 영향력과 아울러 신덕함의 가문이 의성지방에서 명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작가 신덕함의 저술 동기를 살펴보면, 우씨 열녀가 태어나고 성장한 의성현 東村 店池洞은 의성에서도 사대부가 살지 않는 極東 골짜기였다. 이러한 궁벽한 시골마을에 견문도 없이 節孝智勇(절개, 효, 지혜, 용기)을 겸비한 우열녀의 행실은 옛 열녀보다 뛰어났으며, 하늘에서 타고난 열녀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우열녀의 모든 행실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우열녀의 행적이 묻혀 사라지지 않도록 널리 미풍양속을 권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禹烈女傳 내용은 다음에 게재)



<참고>

◦ 史學硏究 83호 ◦ 禹召史傳

※ 참고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김대길 박사가 제공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