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날(1월 13일)
탑산온천에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9시였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9시 30분발 KOBEE 204에 승차하였으나 좌석배정이 항공기 엔진이 설치된 배의 후미인 관계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소음에 의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파도는 잔잔한 편이었으며, 휴대폰의 안테나 신호는 쓰시마를 통과하면서 점멸되었다.
12시 35분에 하까다 항에 도착하여 입국 신고를 마친 후 일본 관광버스 2대에 분승하여 점심식사장소로 이동하였다. 하까다는 후꾸오까현의 도시이름으로 옛날에는 공창이 성업을 이루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후꾸오까의 인구는 136만명으로 울산광역시보다 조금 많으며, 면적도 조금 크다.
<3박 4일간 고생을 할 1호차 > <첫날 점심을 한 식당 WEST>
점심식사는 후꾸오까 남부 블록에 있는 WEST란 화식 식당이었으며, 메뉴는 불고기 정식형으로 불판에 구은 쇠고기를 다레(양념장)에 찍어서 먹는 스타일이다. 밥과 김치, 국은 몇 번이고 추가로 제공되었으며, 에피타이져나 후식(과일류)도 셀프 서비스로 자유롭게 취할 수 있어 모두들 식사량에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식당입구인 카운터 근처에는 김, 껌, 다레(양념장) 등이 진열대에 진열되어 식사대를 계산하면서 희망하는 손님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고, 장사가 될만한 물건이 있으면 판매하여 수입을 높이려는 일본인들의 상업에 대한 적극성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 후의 잠시 여유를 갖으면서 참가자들이 관심을 갖은 것은 자동차였다. 의외로 차가 작고 특히 경차가 많은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는 800CC 미만이 경차이나 일본에서는 600CC 미만이 경차로 보험료, 통행료, 세금 등에서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일본에서는 차동차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해당 관할 경찰서에서 발급하는 주차장 확보 확인서가 첨부 되어야 하는데, 과거에는 경차의 보급을 위해 이것도 면제 되었었다 한다.
<식당 메뉴> <노란색 번호판의 경차>
관광버스는 2시간 정도 달려 구마모토현에 들어서서 미야하라 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취했다. 휴게소에는 즉석코너가 많이 있어, 찌꾸와(어묵 류), 만쥬(찐빵) 등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것 외에 아소산에서 나온 한방재료로 만든 한방차 등도 팔고 있었다. 연근을 와사비(구추냉이)에 묻혀서 만든 가라시 렌꼰(와사비를 발라서 튀긴 연근)코너에서는 시식으로 꺼내놓은 가라시 렌꼰을 나에게 권하면서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황급히 안쪽으로 치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 이전에 한국 관광객으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을 되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꾸오까에서 가고시마로 이동은 고속도로로 하였는데 왼편은 산이 많았고, 오른 편은 밭이나 주택가가 많았다. 산 밑편 낮은 곳에는 스기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어 기후의 온화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2시간을 더 달려 버스는 기리시마에 들어서서 새우 고원(에비노 고우엔)에 도착했다. 에비노 고우엔은 해발 1,240미터로 자연연구로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바로 위에 해발 1,310미터의 유황산이 있었다. 이 유황산은 기리시마에서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화산으로 1768년에 만들어졌다 한다. 쇼와 37년까지 유황을 채취하였기에 지금도 유황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있다 한다. 에비노 고원에서는 한국악(가라꾸니다께)가 가깝게 보였는데, 한국악은 해발 1,700미터로 산의 정상에 서면 한국이 보인다하여 한국악으로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한국악을 가라꾸니다께라고 읽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져 있는 것 같다. 기리시마에 들어서면서 길이 워낙 좁고 급커브가 많아 많은 사람들이 멀미로 고생을 했다. 한국악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계단으로 만들어 져있는데 사용된 돌이 현무암 같이 보였다. 첫날 숙소인 기리시마 로열 호텔은 한국악에서 40분 거리로 그 사이가 온천지역인 관계로 군데군데의 지면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유황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에비노고원의 안내표지판> <에비노고원에서 바라 본 한국악>
기리시마 로열 호텔은 제법 큰 호텔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 져, 숙박과 식사는 서관에서, 온천과 여흥은 동관에서 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는 화식으로 준비되었는데, 돼지고기 야채 국, 된장국, 계란 찜, 생선, 메밀, 튀김 등 다양한 먹거리가 올라왔으며, 밥도 추가로 제공되었다. 식사 후 바로 온천에 가기위하여 유까따(잠옷)를 입고 온 참가자들의 모습들도 보였는데, 일본에서는 호텔내에서는 유까따와 슬리퍼 차림으로 배회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식탁 가운데에는 “음주운전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라는 문귀가 적힌 경고문이 놓여져 있었다. 경고판을 보면서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소주를 준비해 온 참가자들이 있는 테이블에서는 반주를 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첫 저녁 식사이기에 전체가 자기소개를 하며 친숙해 질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 안 된 것이 조금 아쉬웠다. 호텔에는 다른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와있었는데, 별도로 마련된 큰 방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는 등 이벤트를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첫날 숙소인 기리시마 로열 호텔> <기리시마 로열호텔 전경>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30분 정도 가벼운 대화를 한 후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 입구에는 한국 관광객이 많은지 “한국식 온천”이란 안내판도 걸려 있었다. 온천은 유황천이었으나 시설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물도 그리 뜨거운 편은 아니었다. 숙소가 있는 건물과 온천이 있는 건물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 이동시에는 상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매일 찍는 사진량이 많고 또 견학연수기를 작성하기 위하여 가지고온 노트 북에 매일 찍은 사진을 저장시키고 바로 바로 노트 북에 주요한 내용을 기록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2. 둘째 날(1월 14일)
첫 날밤은 오랜 대화로 새벽 3시가 되어서나 눈을 붙일 수 있었기에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6시의 모닝콜을 받아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샤워로 멍한 머리를 맑힌 식당으로 내려갔다. 조식은 뷔페로 준비되어 있었다. 조식을 마치고 일행은 버스에 몸을 싣고 기리시마신궁(진구)으로 향했다.
기리시마진구는 일본 최초의 왕의 아버지를 모신 신사로써 무척 오래된 신사이다. 일본은 천황이 바뀌면 년력도 바꾸는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쇼와천황이 서거하여 지금의 천황으로 바뀌면서 년호가 평성(헤이세이)으로 바뀐 지도 벌써 19년이 된다. 신사주변에는 700년 묵은 스기가 서있었으며 그 나무에는 신기(神氣)를 높이기 위해 새끼줄 같은 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신사 양쪽 통로에는 기원을 비는데 필요한 물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가 잘 보존된 나라라고 느껴진다.
<700년 나이의 스기 나무> <신궁 왼편의 스기 나무 조경>
기리시마 신궁을 뒤로하고 일행이 탄 버스는 기리시마를 벗어나 가고시마로 들어갔다. 가고시마는 인구 60만의 도시로 막부를 붕괴시키고 명치(메이지)를 세우는 데 중요 역할을 한 사이꼬 다까모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방문하는 선엄원(이소떼이엔)은 일본의 3대 정원인 고라꾸엔, 겐로꾸엔, 가이라꾸엔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의 정원이지만 12세기말 시마즈 가문에 의해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게 꾸며진 정원이다. 물을 이용한 수로와 조그마한 연못도 조성되어 돌과 돌다리 및 수목에 의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선엄원의 안내문> <선엄원의 안내 지도>
선엄원 입구에 들어서며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단이었다. 통로를 따라 각양각색의 목단이 심어져 있었으며, 일부는 볒짚으로 갓을 만들어 조경의 조화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단을 정원 안으로 들어가도 군데 군데에 화분에 심겨진 상태로도 놓여져 있었는데, 선엄원안에 목단이 많이 심어져 있는 이유는 시마즈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목단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마즈 家門의 家文과 심어져 있는 목단>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고, 소철과 붉게 물든 단풍도 심겨져 있었다. 정원에는 잘 손질된 소나무가 사방에 늘려져 있으며 중앙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는 높이가 50미터 이상의 크기였으나 인위적인지 아니면 자연적인지 그 소나무가 옆으로 크게 누워져 있었다. 워낙 분재를 좋아하기에 정원 안에 손질된 소나무는 모두 사진에 담았다. 조경의 일부로 담수시설이 되어 있어 그 담수시설로부터 내려오는 물의 수력을 이용해 발전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일본 최초로 설치되었다는 가스등의 유물도 조경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나무가 많이 사용된 조경>
<포석정과 비슷하게 물을 이용한 조경>
<대나무를 심어 조경한 고우난 찌꾸린(죽림)>
<돌과 수목의 조경 전경>
시마즈라는 집안이 16대전부터 산업발전에 힘을 쏟아 방직기, 선반 등 산업설비의 생산에 주력하였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가업을 계속이어 가며 가고시마가 잘살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한다. 시마즈는 정치인 보다는 산업인의 지도력으로 발전 기반을 닦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선엄원 바로 옆에 세워진 상고집성관에는 방직기 등의 산업설비, 선반 등의 공작기계 등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화포, 폭탄 등의 무기류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11시인 집합 시간에 쫒기여 제대로 보지 못하고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오던 중, 지역특산물을 이용한 상품판매장에서 흰색의 고구마를 2개 구입하였다. 이것은 붉은색을 띄고 있는 일반고구마보다 당도가 높도록 품종 개량된 것으로 무척 달았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대나무를 이용한 조경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대나무를 이용하여 조경을 한 곳이 있었다. 일정 지역내에 대나무를 밀식하여 강남죽림(고우난 찌꾸린)이라 이름 붙은 곳이었다. 역 조경에는 물, 나무, 돌을 이용하여 조그마한 자연을 만ㄷ르어 내는 기본 원리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은 것 같다. 이어령씨가 쓴 축소지향주의의 일본인이란 책이 생각나게 하는 정원이었다.
<돌과 물 그리고 수목의 조경 2>
<돌과 물 그리고 수목의 조경 3> <주차장 상점에서 판매하는 흰 고구마>
버스는 15분 늦게 돌아온 마지막 사람을 태우고 괴물 뱀장어(가이부쯔 우나기)가 서식하고 있다는 이케다 호수로 향했다. 이케다 호수는 개문악(開聞岳)(가이몬다케)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최고 수심이 2,200미터 이고, 큰 호수여서 자연 정화력이 커서 맑은 수질을 갖고 있었으며, 이 호수에는 괴물 장어(다이 우나기)가 잡힌다 하는데. 그 크기는 뉴질랜드에서 서식하는 뱀장어 정도의 크기였다.
<이께다 호수에 대한 설명문> <이께다 호수 전경>
<대뱀장어 설명문> <대뱀장어 실물>
둘째 날 점심은 이케다 호수에 접해있는 식당에서 했는데 57명이나 되는 단체이기 때문인지 튀김류는 식어 있었고, 덴쯔유(튀김을 찍어 먹는 양념) 및 간장도 없었어, 소바(메밀국수) 국물에 찍어서 먹어야 했다. 한국 사람의 식사량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아니면 담당 여행사에서 그렇게 주문을 했는지 어느 식당을 가도 식사량은 충분하였고, 양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추가 제공을 하여 주었다.
호수 주위로 만들어진 도로변의 공지에는 대규모의 유채가 심겨져있어 길이 온통 노란 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일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채꽃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촬영을 하였다. 이렇게 유채를 심은 것은 이부스키(指宿)나노하나(유채) 마라톤 대회 개최를 대비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그 마라톤 대회 개최일이 바로 오늘이었으며, 모래온천장이 있는 스나무시 회관으로의 이동에 차질이 예견되고 있었다. 이동 중 가고시마의 知覽(지란)이란 지역을 통과할 때 이 지역에는 가미카제(신풍) 훈련소가 있었으며, 훈련병의 약 90%가 럭비선수였고 그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호수와 도로 사이에 심겨진 유채> <버스의 출발을 배웅하는 식당 관계자들>
염려하였던 것과 같이 스나무시 회관 근처에 오니 경찰관에 의한 교통통제가 진행되어 일단 버스는 우회도로를 활용하였으나, 그것도 바로 막혀 도보로 스나무시 회관으로 이동하였다. 1,400천이 참가한 마라톤 대회이지만 일반인이 대다수였다. 지쳐서 걷는 사람, 걷는 것 같은 속도로 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길가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밑의 사진과 같이 일본에서는 집 앞에 조그만 공간이라도 있으면 꽃을 키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공간이 없으면 벽에다 화분을 걸어서라도 화초를 키우는 모습들은 보기 아름다웠다.
<마라톤 대회 모습> <집앞의 공간과 벽을 이용한 원예품>
스니무시 회관은 바다와 면하고 있는 모래사장위에 비가림 시설을 하여 세워져 있었으며 이부스키시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모래 온천장이다. 2층에서 구입한 입장권을 제출하면 유카다와 수건을 받고, 1층으로 내려가 탈의실에서 유카타로 갈아입은 후 슬리퍼를 신고 스나무시 온천장으로 들어간다. 스나무시는 지열을 의해 가열된 모래를 이용한 모래온천장으로 모래를 깊게 파면 팔수록 온도가 높아지는데 40 - 50도 정도로 이용객의 나이 등을 고려하여 모래층의 깊이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표층까지 전달되는 지열은 아무 곳에서나 나오는 것은 아니고, 특정한 위치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한참 기다린 끝에 모래 온천장에 들어가니 삽을 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있어 모래 온천을 마친 이용객이 나가면 그 자리를 삽을 이용해 고른 다음 손님을 눕게 하고 삽으로 모래를 덮는다.
<에스컬레이터 시설의 스나무시회관> <회관 입구에 놓아진 거대한 무우>
앞의 이용객에게 물어보니 그리 뜨겁지 않다고 해서 좀 뜨겁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니 모래의 깊이를 좀더 깊이 판 다음 그 자리에 누우라고 했다. 카운터에서 받은 수건을 머리에 둘러싸서 모래가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지 않게 한 누웠더니 삽으로 주변의 모래를 퍼서 얼굴만 제외한 온 몸을 모래로 덮었다. 너무 깊게 팠는지 5분을 견디니 얼굴에 땀이 나고 등짝이 뜨거워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권유 시간인 10분을 채우기 위해 몸을 비틀고 반야심경도 외우며 10분을 채우고 나왔는데, 몸으로 느낀 모래온천의 온도는 48도 근방이었다. 모래 온천장에서 나오면 목욕탕을 경유하게끔 되어 있어 모래에 묻은 모래를 씻어 낸 다음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스나무시 온천의 전경>
관람객이 많아 20분, 30분을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하고, 또 모래온천장에 가서도 다시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이용객이 많은 것을 보니, 경북북부지역에 적당한 위치에 천연 지열을 이용한 것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시설을 만들면 지역 활성화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진군 덕구의 경우는 용출하는 온천수의 온도가 전국 최고 수준으로 높으므로 그 열을 이용하면 큰 어려움 없이 모래 온천장의 구축이 가능하리라고 판단되었다.
마라톤 대회의 뒷정리로 꽉 막힌 도로를 1시간 반이 넘는 긴 시간을 소비하며 가고시마 항으로 돌아와서 관광버스를 탄 채 페리에 승선하여 10여분의 항해로 사꾸라 지마(벚나무 섬)로 넘어 갔다. 승선료는 무인화 시스템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출구에 설치된 설비에 의해 은행의 구좌로 바로 연결되어 출금되는 시스템이라 한다. 그러한 설비의 설치의 보급을 위해 국고의 지원이 있고 여행사 같이 자주 사용하는 기관에는 할인도 하여 준다고 한다.
<페리에서 본 가고시마 야경>
붕어빵에 붕어 안 들어 간 것처럼 사꾸라 지마에는 벚나무가 없는데 그냥 아름다운 이름을 만들다 보니 사꾸라 지마(벚나무섬)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사꾸라 지마에서 미야자끼시로 넘어가는 도중에 설치된 사꾸라지마의 활동 중인 화산 분연구를 관망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어두워진 상황이라 사꾸라 지마 전망대는 그냥 통과하면서 숙소인 미야쟈끼시 가와하라에 있는 호텔 프라자 미야쟈끼에는 8시 40분이 넘어서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하기직전까지 1호 버스 안에서 참가자들이 앉은 순서로 자기소개 및 지역 소개가 이루어 졌는데 탑승자 2/3정도까지 진행 되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발표하는 내용은 서로가 몰랐던 많은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3. 셋째 날(1월 15일)
간단히 차려진 조식을 마치고 어제 밤에 보지 못했던 오요도 가와 강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차도와 강사이의 둔치에 만들어진 통행로에는 출근자들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으며, 길 옆 화단에는 판지 꽃과 뽀삐(원예용 양귀비)가 이쁜 색상과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아편의 주요성분인 알칼로이드 성분이 안 나오는 원예용 뽀삐를 이용한 조경이 많이 있다. 오요도 가와는 한강의 절반 정도의 폭으로 수질도 맑고 잘 정비된 강이었다.
<미소시루, 두부, 연어 그리고 밥> <버스의 출발을 배웅하는 식당 관계자들>
<오요도가와> <오요도 가와와 호텔 부근>
일행이 탄 버스는 미야자끼 호텔을 뒤로하고 우도신궁이 있는 우도 미사끼를 향하였다. 미사끼는 곶이란 말로 해안에서 돌출한 지형을 말하는데 우도미시끼로 가는 길은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왕복 2차전의 길로, 해안에는 오니노 센따꾸 이따(도깨비 빨래판)라는 기이한 형태의 암석이 늘어져 있어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우도미사끼에 있는 우도신궁은 토요타마 히메가 아들인 우가야 후끼아에즈 미고또를 낳을 때 “우”라는 바닷새의 깃털을 모아 산실을 꾸미었기 때문에 우도 신궁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일본에는 실제로 “우”라는 바닷새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 있는데, 배고픈 우가 잠수를 하며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새의 긴 목을 질긴 실로 묶어놓고는 새를 건져 올려 물고기를 꺼내는 어업방법이다.
<우도 미사끼(곶)의 전경> <우도신궁으로 가는 터널>
우도신궁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긴 계단과 터널로 이어져 있었다. 신궁은 해안가의 큰 바위 밑의 넓은 틈새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도 신궁 자체의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신궁 바로 앞의 해안에는 신기한 모양의 기암들이 늘어져 있었다.
<우도 신궁 앞의 상가> <우도신궁 경내도>
<돼지해를 맞아 멧돼지가 걸린 건물> <우도 신궁이 세워져 있는 바위틈새 >
밑쪽으로 “마메이와”라는 바위 윗면의 움푹 파인 부분에 물이 고여 있어 신궁 앞에서 콩알만 한 돌을 던져 그 파인부분에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하여 구입한 돌 콩알을 여러 사람들이 던지고 있었다. 기암들은 형태도 신비스러운 모습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질감에서도 화학 수지를 녹여 놓은 것 같은 부드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어 더 더욱 이채로웠다.
<신궁 앞쪽의 기암들> <움푹 파인 마메 이와>
토요타마 히메가 애를 낳을 때 그 모습을 남편이 보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긴 벌로 토요타마 히메가 용궁으로 돌아가게 되고 어린 우가야 후끼아에즈 미고또는 바위에서 나온 젖을 먹으며 성장했다고 하는 곳이다. 젖이 나왔다고 하는 바위를 보니 마치 어머니의 젖에 꼭지가 튀어 나온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관광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여유가 생겨 상점 앞에 서니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이 표고버섯과 금귤을 팔고 있었는데. 표고분말 등으로 시식음료를 만들어 마셔보라고 열심히 권하면서 통하지도 않는 일본어로 한국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가 가능한 나에게 시이다께(표고버섯)를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느냐, 낀깡(금귤)을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느냐 등 묻고 열심히 받아 적어 놓는다. 아마 다음에 오는 한국인들에게 표고버섯과 금귤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물어 놓는 것 같았다.
<신궁이 있는 바닷가의 기암>
<과거 신궁복구 사업 내용> <헌등과 엉성하게 쌓아 놓은 석벽>
조금 더 걸으니 신궁으로 갈 때 누군가 우리 일행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우리일행이 신궁에 둘러보고 돌아오는 사이에 프린트하여 게시판에 걸어 놓고 사진 찍힌 사람들은 1장당 500엔(4,000원) 사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본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비쌋지만 한 장에 500엔(4,000원)에 구입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사진 찍은 사람 역시 나중에 사진을 사 갈만한 사람들만 선별하여 찍었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진들이 안 팔리고 남아 있었다. 대단한 상술이란 점과 또한 사진을 찍은 노인의 수입이 결코 무시 못할만한 수입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도 미사끼와 미야자끼시 사이의 해안에는 오니 센따꾸 이따(도깨비 빨래판)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빨래판 같이 생겨 자연이 만든 걸작중의 하나였다.
<해안가의 오니 센따꾸 이따(도깨비 빨래판)>
버스는 다시 미야쟈끼 시로 돌아와 아오시마(靑島)의 휴가 신화가 담겨 있는 아오시마 신사를 둘러보았다. 그리 큰 규모의 신사는 아니었으나, 긴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오니 센따꾸 이따(도깨비 빨래판)가 다리 양편에서 신사 입구까지 보기 좋게 돌출되어 있는 자연 경관 및 신사 내에 열대림 같은 조경이 잘 꾸며져 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도깨비 빨래판의 확대 촬영> <도깨비 빨래판의 근접 촬영>
<아오시마 신사의 표석과 신사 설명문>
<종이접기 문화가 발달한 일본> <소원을 기리는 곳>
아오시마 신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처 들르지 못했던 미야자끼현립 아열대 식물원에 들렀다. 아열대 식물은 온실 안에 꾸며져 있었으나 시간상 온실까지는 둘러보지 못하였다. 간단히 몇 장을 사진기에 담고 길모퉁이 상점 앞에 왔을 때 무척 재미있는 상품이 눈에 들어왔다. “못 말리는 아내입니다”, “못 말리는 남편입니다”, 귀여운 손자랍니다“ 등등의 문구가 귀여운 디자인으로 쓰인 셔츠가 진열되어 있었다.
<미야자끼 현립 아열대 식물원> <열대식물 사이의 튜우립>
<자연스런 튜울립의 홍백전> <재미있는 문귀가 셔츠 진열대>
셋째 날의 일정 중 시간 관계상 니치난 공원과 평화 대공원의 일정을 없애고 활동 중인 아소산의 분화구를 아소산 관광으로 일부 코스가 변경되었다. 아소산으로 가는 도중 부페식의 다베호우다이 식당에 들러 점심을 푸짐하게 마쳤다. 일본에서는 부페식 식당을 바이킹이란 표현을 쓰나 보다....
식사를 일찍 마친 편이어서 산책도 할 겸, 그 식당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 유리온실 내부가 궁금하여 들어가 보았더니 절화장미를 수경재배하는 장미원이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유리 온실이었으며, 새로운 꽃 몽우리를 기다리는 시기 같았으며, 지난 번 절화시 잘려지지 않고 남아 홀로 핀 붉은 장미가 눈에 들어와 사진기에 담았다. 거의 자동으로 움직이는 듯 배선과 배관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장미 재배에 사용 중인 약제와 영양제도 보였다.
<뒤 늦게 홀로 핀 방미>
버스는 아소산을 향해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첫날 들렀던 미야하라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제 자기소개를 하는 사이에 어느 듯 버스는 아소산 중에서 중간 높이의 산인 해발 1,323미터인 나까다께에 도착했다. 대형버스는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하여 밑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프웨이(곤돌라)를 타고 분화구가 있는 정상으로 올라갔다. 곤돌라는 97인 승으로 관광객이 너무 많아 97명을 꽉 채우고 올라갔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이동 중에 찍은 풍력발전소와 양수발전소>
혹시 모를 화산의 급작스러운 분화를 위해 분화구의 주위에는 대피소가 콘크리트로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분화구 주변에 설치된 긴급 대피소>
분화구는 둘레가 4킬로에 깊이는 100미터이고, 거기에 있는 물의 온도는 100 - 200도라 하며 수증기 틈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물색은 빛의 산란에 의해 에메랄드빛을 띄고 있었다.
<유황 가스를 품고 위로 올라오는 수증기>
분화구는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어 수증기가 대량으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SO2를 대량 함유하고 있어 수증기가 관람객을 향할 때는 관람이 금지되고 있다. 분화구 한 모퉁이에는 조용한 화산 활동을 기원하는 재단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부탁해요 토지신님” 이란 문귀가 세워져 있었다. 일행은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까지는 도보로 내려왔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언어는 한국어였으며, 특히 한국의 중고생들이 서울과 부산의 단체 2개 팀이 온 것 같았다. 도로 옆에 안전을 위해 세워진 가이드 레일이 유황 가스에 노출되어 위험할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토지신께 기원하는 재단> <유황에 의해 부식된 도로 가이드>
아소산에는 평원이 있어 그 중 하나의 이름이 “구사센리(草千里)”이다. 천리에 걸친 초원이란 뜻이다. 구사천리 좋은 길목에는 아소화산 박물관, 아소고원의 특산물 판매장등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이미 영업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다.
<구사센리(草千里)> <아소화산 박물관>
<마른 갈대로 덮인 구사센리(草千里)> <아소산의 일부>
마지막 날의 숙소인 아소시에 있는 가도만이란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은 일본식으로 꾸며진 다다미방의 호텔이었으며 온천은 유황천이었다. 식사는 피로연이 가능할 정도의 큰방에서 우리 일행들만의 공간이었다. 음향시설도 갖추고 있어 식사와 함께 각 시군의 대표 가수(?)노래 경연도 함께 진행되었다. 모두들 대단한 가창력을 갖춘 준 프로급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었다. 노래 실력은 투자에 비례한다고들 하는데. 모두들 얼마나 투자 하였을까.
일부 식사를 마치신 분들은 자리를 떠났지만 정말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연수 마지막 만찬> <만찬과 함께 벌어진 시군대표 경연>
만찬식사 후 호텔에 있는 가라오께 룸을 2시간 빌려 2시간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가라오께 룸은 스텐드 바식으로 무대까지 만들어져 있었으며, 모니터는 3대나 준비되어 있었다.
4. 넷째 날(1월 16일)
마지막 날은 귀국을 위해 하까다 항에서 1시 반 출발의 코비에 승선해야 하고 일정이 더 남아 있어 호텔에서의 출발은 6시 50분이었다. 6시 30분부터의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6시 50분에 출발키로 하였으나 결국 7시 10분인 20분 늦게 호텔을 출발하여 일품일촌의 발상지인 오오야마로 이동하였다.
<전형적인 일본 호텔의 아침식사>
오오이따현의 오오야마시는 매실로 유명한 곳이다. 지역 특산물인 매실을 이용하여 매실주, 매실즙, 우매 보시 등을 지역의 특산물로 하고 있다. 또한 표고버섯 재배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이동 중 강을 따라 소규모의 온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목이 많고 온천지대라서 그런지 수자원은 풍부한 지역이었다.
<강에 접해 있는 온천 마을> <온천 빛을 띠는 강>
표고버섯을 생산하는 방법은 톱밥과 원목으로 재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원목으로 한 것이 가격이 높다고 한다. 표고 버섯재배에 있어 한국이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기술은 건조기술이라고 하는데,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해서 그런지 쉽게 기술 습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을 따라 만들어진 국도, 정말 좁다 > <오오야마시의 안내도>
오오야마에 도착하니 주위가 온통 매실나무가 심어져 있었으며, 오래된 고목에서부터 심은 지 얼마 안되는 유목까지 많이 심겨져 있었다. 매실도 배나무와 같이 온실 파이프 등을 이용하여 가지를 수평으로 유인해서 잎들이 고루 햇볕을 받도록 정지를 하여 놓은 모습들도 보였다.
<지역 곳곳에 조성된 우매(매실) 과수원>
<자연 상태의 매실> <가지를 유인하여 정지한 매실나무>
<오래된 매실나무> <심은지 얼마 안 되는 매실나무>
목적지인 히비끼노 사또(여운의 마을)에 도착하니 정말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고, 매실 가공공장과 만매관이 함께 운영되는 건물도 잘 지어져 있었다. 오오야마시에는 댐이 2개 있어 그 댐을 식수로 이용하는 후꾸오까시나 하까따시로부터 사용료를 받은 것 중의 약 70%를 사용하여 매실 가공공장과 판매장을 설립하였다한다.
<오오야마시의 안내도> <히비끼노 사또>
<히비끼노 사또의 건물> <주차장 옆에 조성된 그라운드 골프장>
오오야마는 1,050호가 살고 있으며 주민은 약 4,000명으로 이중 650호가 조합원으로 가입되어 매실을 재배하고 있다. 2, 3년전까지의 생산량은 약 1,000톤/년 정도였으나 지금은 약 700톤/년을 생산하고 있다. 매실의 가격은 3년전까지만 해도 100-200엔/킬로그램 이었으나 현재는 300-400엔/킬로그램에 농가로부터 수매하기 때문에 농가의 소득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가공공장은 4년전에 시나 국가가 아닌 주민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공무원은 한사람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 한다. 이 마을이 이렇게 매실로 유명하게 된 것은 1961년에 하와이에 매실, 밤나무를 심자는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라고 한다. 그러던 중에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 술 대회에 참가하여 큰 호평을 받은 것이 TV등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주문량도 크게 늘었고, 오오야마 시에서도 매실대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홍보에 가속이 붙었다 한다. 이 가공공장은 농가에서 생산한 매실을 전량 고가로 구매 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제3섹터의 운영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있으나, 대부분 적자인데 비해 이곳은 흑자로 운영되고 있다한다.
기술적인 백업을 위해 일본에서도 유명한 니까 위스키에서 파견 나온 기술자가 주재하고 있으며, 설중매(셋쭈우바이)와도 연계되어있다 한다. 영업은 4명이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 연수단에게 설명을 해준 분은 만담계통의 예명까지 가지고 있는 가와즈 야쯔오란 분이었다. 가공공장 내부에는 스테인 스틸로 만든 탱크와 나무로 만든 통 및 포장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진 대형 탱크나 다루(오크통)에 원료인 매실, 알콜, 설탕 및 허브를 넣고 1년 반 정도 발효 내지는 침출을 시킨다.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만들어낸 매실주는 싸나 오크 통에서 만든 매실주는 비싸게 거래되고 있으며, 액기스는 농가에서 만들며 이 공장에서는 매실주만 만든다고 한다.
<매실주 제조공정> <침출 발효용 다루>
<스테인레스 스틸제의 침출 발효조> <포장 기계>
2층 공장 및 마을에서 만들어진 가공품은 1층에 마련된 판매장에 진열되어 손님을 기달리고 있었다. 약 40여평의 판매장으로 시음대도 준비한 잘 꾸며진 판매장이었다.
<히비끼노 사또의 매실 가공품 판매장>
<판매장의 내부 진열대>
현재 매출은 년간 1억엔에 약간 못 밑치고 있으나 매년 성장률은 크게 늘고 있다 한다. 또한 이 마을은 국제교류가 성행하며, 이스라엘, 독일, 필리핀, 대만등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한다. 홍보와 판매를 위한 여러 이벤트도 기획하고 있어 농가의 소득을 높혀 주고 있는데, 소득이 많은 농가는 1,000-2,000만엔/년 정도이고, 적은 농가는 300-500만엔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4년에 한번씩 매실 콩쿠르도 개최하고 있는데 금년 11월이 5회째 개최라고 한다.
매실가공공장을 뒤로하고 같은 시에 설치된 지역의 농산물 및 가공 상품을 판매하는 미찌노 에끼에 들렀다. 이러한 미찌노 에끼는 규슈지역에는 많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 미찌노 에끼에는 비교적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식당도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잘 디자인되고 깨끗한 화장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상가 안에는 지역에서 생산된 표고버섯, 매실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일반 농산물도 판매를 위해 진열되어 있었다.
<판매장의 내부 진열대>
상가 밖에는 여러 가지의 과실수 및 화훼류의 묘목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품종 개량이 활발한 나라이므로 배, 사과, 매실 밤, 감 등의 과수에 대해 여러 가지 종류의 묘목들이 품종별로 진열 되어 있었다. 분재용 매실이 조그만 화분에 심겨 진열되어 있었고 목단도 어린 묘목이 새싹이 나온 상태에서 화분에 심겨 진열되어 있었다. 판매용으로 진열되어 있었지만 전체가 어우러져서 하나의 조경으로도 보였다.
<외부 판매장의 과실수 및 화훼류>
미찌노 에끼 뒤편은 개울이었는데 개울에 있는 자연석으로 보기 좋게 정비되어 있었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까지도 밑의 사진에 있는 호박돌을 이용해서 만들어져 있다. 개울을 직선화시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연을 그대로 살린 조경이었다.
<정비되어 있지 않은 개울> <정비된 개울>
<정비되어 있는 미찌노 에끼 뒤편 개울> <미찌노 에끼 뒤편 산책로와 조경>
미찌노 에끼란 발상 및 주변 시설을 제외하고는 색다르게 볼 만한 것이 없어 일행은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시간에 출발하여 마지막 코스인 면세점을 향했다. 일본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후꾸오까 면세점은 조그만 면세점으로 한국 방문객이 많은지 한국어로 쓰인 안내문과 한국인들로 구성된 직원들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특별히 살만한 물건이 없어 면세점밖으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니 거리가 실로 깨끗하였다. 조그만 상가라도 주차장을 겸비해 있었고, 도로와 접해있는 정비공장이나 판매장은 도로를 거의 점유하지 않았다.
<주차 문화와 깨끗한 거리>
일행은 부산으로의 출발항인 하까다 항을 향했다. 하까다항 도착 직전 몇 일간 고생을 한 박영이 가이드의 인사와 출국 절차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공식 일정은 마무리 되었다.
귀국 날은 날씨가 흐리고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 파고의 높이도 높을 것 같아 배 멀미가 걱정이 된다. 멀미약은 배타기 30분전에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까다 항의 2층 출국장의 의자에 앉아 나누어 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마친 후 출국 통로 옆에 설치된 한국 관광 안내관에 들러 보았다. 대구, 경주, 부산 등등 주요 관관지의 코너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팜플릿이나 카타로그가 비치되어야 할 공간이 대부분 텅 빈 상태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방문객들의 관심이 너무 커서 비치 자료가 너무 빨리 없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이동시간이 많았고 일정에 쫒긴 조금은 피곤이 쌓인 연수였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 발굴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