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읍(義城邑)에서 남쪽으로 4km 못 미쳐 금성면(金城面) 대리리 224-2번지 일대 63만㎡에 사적 의성 금성면 고분군(義城 金城面 古墳群)이 널려있다. 많은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능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경덕왕릉. 유증선의 『영남의 전설(嶺南의 傳說)』은 왕릉발굴과 관련한 전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을 마련하기 위하여 한 작은 언덕을 갈고 있으니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히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금칠을 한 석실(石室)의 가운데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므로 탐이 나서 벗겨보려 하였더니 관이 손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의성군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 곳에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라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것을 발견하여 잘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둘레 74m, 높이 8m의 이 능이 조문국 경덕왕의 능으로 밝혀진 것은 초간일기에서 부터였다. 1589년(선조 22) 7월 11일 56세의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일기에서 둘레가 74m, 높이가 8m의 이 능(陵)의 주인공이 경덕왕임을 밝히고 있다.
삼한 때에 거느리던 여러 나라가 혹 50개 이거나 70개였는데, 바둑판처럼 펼쳐있고 별처럼 널려있었으니 땅의 경계가 접하고, 땅이 연이어 있어 그 땅의 크기가 커봤자 사방 100리도 되지 않았었다. 조문국은 문소현 동남쪽 빙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도 궁궐의 터가 아직 남아있다. 거친 숲과 우거진 수풀 가운데 무덤이 겹겹이 있는데 모두 당시 군왕의 무덤이다.
밭두둑 사이에 꽃밭이 있어서 모란이 멋대로 자라 해마다 꽃이 피고 지는데 농부들이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 당시 임금이 꽃을 감상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밭을 가는 농부의 쟁기가 땅을 갈다가 때로 돌에 부딪히면 땅속에서 음악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 모르겠지만 나라가 망할 무렵 영인(伶人 음악을 맡은 벼슬아치)들이 악기를 그 아래에 묻어 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라가 망한 뒤 남은 원통함이 황천 아래에 맺혀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촌 늙은이가 꿈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고 옷이 풍성하면서 아름다웠다. 그가 시를 지어 노인에게 주었는데
金陵往事與誰論 금릉의 지나간 일 누구와 더불어 말해볼까
千載猶存敬德墳 천년 세월에도 경덕왕의 무덤은 남아 있네
飛鳳曲亡人不見 비봉곡은 없어지고 사람은 볼 수 없는데
召文琴在杳堪聞 조문의 거문고 소리 아득하여 들리지 않네
라는 내용이었다.
노인이 놀라 깨어나서는 사람들에게 외워 전하였는데, 노인은 글을 한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비봉(飛鳳)은 산 이름으로 조문국의 서남쪽에 있다. 아! 오래된 도읍의 남은 터가 비록 수천 년이나 흘렀지만, 사람의 정신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아 간혹 꿈속에서 서로 감응하는 수가 있으니 이른바 꿈속의 노인이라는 것은 아마도 당시 인물의 정령일 것이다.
이후 미수 허목(許穆)이 조문을 지나다 느낀 바를 시로 지어서 그의 문집에 남겼다. 여헌 장현광은 조문국의 전설을 채록한 글 「봉대설(鳳臺說)」을 남겼다. 담인 신좌모(申佐模, 1799~1877)는 문집에서「교남기행(嶠南紀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초전리(草田里) 경덕왕릉(景德王陵)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이날 초전의 김상사 집에 도착하였다. 주인의 말이, 초전은 옛날 조문국으로 비봉산 아래에 있었으며 경덕왕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선조 때의 인물인 초간 권문해의 문집 내용 가운데 조문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경덕왕릉은 금성산 밑에 있는데 평평해져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 농부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자신이 대왕이라고 하면서 시 한 절구를 지어 주었는데,
飛鳳曲終山獨在 비봉곡은 마쳤건만 산은 홀로 남았고
召文琴古杳難聞 조문금은 옛적에 아득해져 듣기 어렵네
金陵往事憑誰問 금릉의 지나간 일 누구에게 물어볼꼬
千載猶存景德墳 천년 세월에도 경덕왕 무덤은 아직 남아있구나
라는 내용이었다.
농부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인데, 능히 이 시를 외고 있었으며 한 글자도 어긋나지 않았다. 현관(縣官, 현령)이 관영(官營)에 보고하자 관영에서는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특명을 내려 무덤을 지키고 보호하게 하고 세시(歲時)에 향을 하사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
두 사람이 남긴 시에서 순서가 조금 바뀐 것 이외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신좌모의 글에서는 무덤을 보호하고 향사를 지내게 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후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금릉의 지나간 일이 아니라 문소의 지나간 일들을 누구와 의논할 것이냐고 하였다.
경덕왕분(景德王墳)은 조문리 북쪽에 있다. 옛 무덤이 첩첩이 쌓여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고 그중 한 분(墳)이 가장 높은 무덤으로 촌민들이 남몰래 몇 번이나 그 속을 파헤쳐 보려 함에 이웃에 사는 오극겸(吳克謙)이 이것을 보고 놀라 꾸짖고 다시 쌓아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날 밤 오극겸의 꿈에 의복 차림이 매우 이상스러운 한 분이 시 한 구절을 두세 번 정녕코 알려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聞韶往事與誰論 문소의 지나간 일들 누구와 논하랴
千載猶存景德墳 천년세월에도 경덕왕의 무덤은 아직 남아있구나
飛鳳曲亡人不見 비봉곡 끝났으나 사람은 아니 보이고
召文琴去杳難聞 조문금 옛적에 아득해져 듣기 어렵네
대게 오극겸은 겨우 글자나 알뿐 시구를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꿈에서 깨어난 뒤에 이 시를 읊어대니 모두 기이하게 여렸다.
1899년 편찬한 발견한 『의성군지(義城郡誌)』와 『의성현지(義城縣誌)』 등에서는 위의 내용에 더해 1725년(조선 영조 1)에 의성현령 이우신(李雨臣, 1670~ 1744)이 묘를 증축하고 능지기를 한 사람 두고 하마비를 세웠다. 날이 가물면 현령이 글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냈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1932년 류상묵(柳尙默)이 간행한『의성지(義城誌)』에서는 지난 기록에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의성지(義城誌)』에서의 잘못이 크다. 제대로 이해하여야 할 듯싶어 하나하나 나열해 본다.
첫째로는 신라의 경덕왕릉(景德王陵)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 벌휴왕이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임명하여 조문국을 공격하였다.”라는 기록을 들어 조문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신라의 왕과 이름이 같아서인지 구분하기 위한 것인지 조문국왕의 이름을 경(敬) 자로 바꾸는 잘못을 범하였다. 이 책에 근거한 것인지 1965년에 능 앞에 경덕왕릉(敬德王陵) 비석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신라 경덕왕릉은 경주에 있으니 이곳은 조문국 경덕왕릉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조문국은 연대가 짧고 작은 나라였으므로 조문국을 아는 이는 크게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또한 오류이다. 남당 박창화가 필사하였다는 『신라사초(新羅史草)』라 불리는 기록에서는 신라가 오히려 조문국을 오랜 나라로 인정하고 있다. 신라의 전신이던 사로국 또한 처음부터 세력이 강하였던 것은 아니다. 인근 소국을 정복하면서 몸집을 불려 나간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의성군지(義城郡誌)』 등 구 읍지에 전하는 기록에서 “문소의 지난 일(聞韶往事)라는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문소란 지명이 오래된 옛날부터 오던 이름으로만 알고 쓴 것이라는 것이다. 금릉은 금성의 별호이기에 조문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문소라는 지명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일명 『신라사초(新羅史草)』라 불리는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고집에 「아달라기(阿達羅紀)」 16년 7월의 기록이 전한다. 조문국의 왕계가 기록되어 있다. 과거 소국으로서 이처럼 왕계가 남아있는 사례는 없다. 경덕왕의 재위 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조문왕 묘초가 입조하여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왕의 딸 다례를 시집보냈다.
조문(국)을 살펴보면 예왕의 뒤로 처음에 용왕이 6년, 호왕이 2년, 자성여주가 20년, 자성의 신하 봉왕이 7년, 아들 월왕이 11년, 아들 벽왕이 19년, 아들 자제가 52년 동안 사방을 정벌하여 위엄이 동서로 떨쳤으며, 아들 취제가 17년, 아들 소문이 8년 동안 재위하였다가 폐위되었다.
자제의 서자 산운의 침비 탈탈이 산운의 아들 경덕을 낳았다. 산운이 탈탈을 취제에 바쳤는데, 취제가 (탈탈을) 총애하여 후로 세웠다. 취제가 죽자 탈탈은 스스로 신후라고 칭하였다. 소문을 남편으로 맞이했는데, 소문이 나약하여 탈탈이 기뻐하지 않았다.
소문과 그 어머니 소씨가 탈탈을 쫓아내고자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탈탈이 이에 아들 경덕을 세워 65년의 재위 동안 문물이 크게 일어났다. 아들 문무왕 혹은 난제라고 칭하였는데 재위 20년, 아들 문단이 서서 2달 만에 폐위되고, 문단의 동생 목단이 서서 15년, 아들 보문이 서서 25년, 아들 경문이 서서 30년, 아들 비패가 섰다.
숙부 숭덕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3년 만에 폐위되고, 숭덕이 스스로 서서 7년, 아들 윤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선정을 한 지 12년 만에 죽었는데 합이 18년이다. 윤명이 3년 만에 폐위되고, 윤명의 처 호묘가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것이 13년, 그 아들 묘덕을 세웠다.
묘덕은 호묘와 윤명의 서제 쌍덕과 통하여 태어났다. 묘덕은 너그럽기만 하였지, 위엄이 없었다. 8세주가 그 땅을 나누어 살면서 나라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재위가 33년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묘덕은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신하라 칭하였다.
조정에서는 조문을 옛 나라라고 하여, 우대하였다. 이때 드디어 우리의 번국과 사위의 나라가 되었다. 경도에 집을 내렸다. 산을은 이 공으로 작위가 각간에 나아갔다. 호묘(묘초의 할머니)는 평소 산을을 흠모하여 그의 처가 되기를 구걸하였다. 왕은 묘덕을 위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때 역시 허락하였다.
『의성지(義城誌)』 등에 의하면 매년 10월에는 관청에서 향사(享祀)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09년부터 폐하였으나, 지금은 조문경덕왕릉향사계(召文景德王陵享祀稧) 주관으로 시행하고 있다. 향사 시에 부르던 송신곡(送神曲)과 영신곡(迎神曲) 그리고 비봉곡(飛鳳曲)이 전하여 온다.
1) 탈초본에는 ‘상시(常時)’로 되어 있으나, 필사본에는 ‘당시(當時)’로 되어 있다.
2) 영남읍지, 교남지 등에 의하면 조문국 옛터 서쪽의 화전(花田)에 모란이 무더기로 자라는 밭이 있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전부 뽑아버려도 다시 돋아나서 매년 봄이면 꽃과 잎이 무성하다고 하였으니 모란(牧丹)이 아닌 작약을 두고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윤형로(尹衡老, 1702~1782)의 계구암집(戒懼菴集)에도 조문국 시절 모란(召文時牧丹)을 노래한 바 있는데, 의성은 한때 모란과 닮은 전국 최고의 작약 생산지였다. 사적지 주차장에 핀 모란이 질 때쯤, 사적지 한 가운데 작약꽃이 핀다.
3) 담인집 기록과 결부 지어 볼 때 경덕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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