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600호 발행기념
의성의 어제를 공부 한다
“召文國” 의성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고, 이어져오는 자부심
조문국은 경북 의성지역에 기원전 약 2세기 무렵 세워진 초기 국가이다. 지명과 관련지어 가장 확실하게 먼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사로국의 벌휴니사금 2년(185년)에 편입 또는 병합된 기록이 보여 지고, 『삼국사기』지리지에서 ‘召文’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는 바, 그 이전부터 조문국이 존재해왔고 성장해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이러한 기록 이외에는 조문국의 성장과정, 그 구조와 영역, 또한 신라로 편입되어진 이후 어떻게 변모했는지에 대한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96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최근까지 고고학적 자료의 축적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의성 관내의 전체적인 유적 분포의 파악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이것으로 조문국을 어렴풋이나마 이야기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행정구역상 군이지만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고 경상북도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여 다른 지역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특산물로도 유명한 곳이 의성이다. 그러나 농촌지역이며 인구감소로 인해 점차 그 활기를 잃어버릴 지도 모르게 될 곳이 의성이기도 하다.
의성신문은 의성의 어제를 공부하고, 오늘을 행동하며,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첫 단계로 이 기사를 기획하였다. 그 첫 단계로 가장 먼저 조문국과 관련지어 역사적ㆍ고고학적 관계에서 의성의 지명과 변천을 간략하게나마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의성조문국박물관 신은이 학예연구사 인터뷰로 이미 연구되어졌고 진행 중인 역사적ㆍ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삼한시기에서 신라 통일기 이전과 통일기 조문국과 그 지명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고자 했다. 조문국과 관련된 사료의 한계가 있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연구가 되어 있는 부분과 앞으로 연구되어질 부분 또한 상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인터뷰가 의성과 의성의 조문국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다시 알리려는 취지에 있다는 것을 염두 해주셨으면 좋겠다.
인터뷰
조문국박물관 신은이 학예연구사
▶조문국 박물관의 소개를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신-의성조문국박물관의 건립계획과 기초는 의성군 문화관광과(당시 새마을문화과)에서 추진되었습니다. 이후 2012년 6월 건립과 운영을 본격화하기 위한 운영조직이 만들어져서, 2013년 4월 25일에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2012년 11월에 입사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박물관 건립과 관련된 사항을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조문국박물관은 조문국과 의성의 역사를 발굴하고 복원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현재까지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주요 전시 내용과 유물은 선사 시대, 삼한시대, 삼국시대 의성지역의 출토유물 및 모형, 영상물입니다.
▶조문국 혹은 그와 관련해서 의성에서 발굴되어졌거나 발굴되고 있는 고고학적 유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신-2004년 의성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조문국사적지 공원화사업을 시행하면서, 금성면 대리리 2호분이 발굴되어, 현재 금성면 대리리 2호분 고분전시관으로 복원 되었습니다. 아마도 의성군에서 조문국을 염두해 두었던 발굴 혹은 연구 활동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이후 조문국박물관이 앞장서서 주체적으로 유적을 발굴하고 고증하기 위해 진행된 사업은 2014년 신라본역사지움(조문국지구)이었습니다.
▶발굴되어진 유물 혹은 유적이 조문국의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지요.
신-의성에서는 다수의 지석묘(청동기시대)와 고총고분이(4세기중반~6세기 정도)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석묘-조문국-고총고분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통해, 조문국의 실체를 추정하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선 지석묘-조문국-고총고분 집단이 동일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 견해(경북대 주보돈교수), 또한 세 집단이 동일한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 본 견해(동국대 김병곤 교수)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향후 보다 많은 고고학적 발굴유물이 출토되어 문헌사의 부족한 부분을 매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조문국의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근래에 몇 가지 고고학적인 근거가 추적되었는데요. 우선 대리리 2호분 발굴조사 과정에서 삼한시대(조문국 존재시기)의 주된 묘제인 목곽묘가 확인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또한 의성조문국박물관의 발주에 의해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시행한 금성산 고분군 일대의 고분분포지도 작성 중 삼한시대(조문국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일부가 채집되었습니다. 조문국의 실체와 범위, 향방 등 보다 자세한 내용은 향후에 발굴이 더 이루어진다면 더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조문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조문국이 가지는 입지나 가치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처음 발령받아 의성조문국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의성사람들에게 조문국이란 존재는 어떤 것이기에, 이토록 의성사람들의 가슴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한 5년쯤 근무를 해보니, 의성사람들의 조문국에 대한 애정은 단순히 지금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문국과 관련된 기록들은 조선시대 때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와 문헌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 중후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조문국 경덕왕릉에 대한 이야기도 그 시기의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문소 지도에도 조문국이 의성에 존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고, 지도 가운데는 경덕왕릉이라는 무덤그림도 나옵니다. 또한 미수허목 선생님의 ‘過召文有感(조문국을 지나다가 감회가 들어)’라는 시구에는 「천 년의 조문국 멸망한 빈터, 슬프고 처량 하네 …중략… 농부는 두둑에서 밭을 갈면서도 오히려 경덕왕을 이야기하네. 천지는 어찌도 유유하던가? 예부터 얼마나 흥하고 망했던가? …중략… 지나간 옛일이 한스러워서 홀로 서서 길이 탄식 한다네」라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오늘날 의성사람들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조문국에 대한 애착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여 집니다. 어쩌면, 조문국이 갖는 의미와 존재의 상징성은 그 실체의 위대함이나 대단함을 뛰어 넘어, 의성사람들의 가슴 깊이 면면히 이어져 오는 자부심이 아닐까요.
▶조문국을 소문국이라 읽기도 하던데요.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어떻게 읽어야 될지 간단하지 않은데요. 먼저, 소문국이라 불리는 견해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일명을 (淵)蓋金이라고 표기한 사실이 주목된다. 그래서 고구려어로 ‘소문’이 금을 나타난다고 보았다.”처럼 경북대 주보돈 교수님의 견해가 역사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음만을 빌리는 이른바 음차 표기가 널리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조문국이라고 읽는 경우는 의성지역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리어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의성지역에서 오랜 시간 구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향후 그렇게 된 이유와 요인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의성지역의 조문국 구전 설화의 상징과 가치에 대한 탐구 또한 연구 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조문국의 지명을 가장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사료는 무엇일까요.
신-현재까지 삼국사기 이외에 학계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문헌사료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 가운데 의성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서술되는 과정에서, 조문국에 대한 내용이 종종 확인되는 만큼, 고대사 영역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의 문헌을 찾아보시는 것도 다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문국의 명칭 변화가 있었는데요. 그것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경덕왕(8세기중엽) 때 조문국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쳐졌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지 그 사이에 어떠한 지명으로 불려 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당시 전국의 지명을 한문표기로 바꾸던 신라의 대대적인 한화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서 조문국이 사로국에 의해 멸망된 시점은 2세기였습니다. 대개 삼국사기 초기기사의 기년 문제와 고고학적 출토유물의 양상을 고려한다면,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쯤 조문국이 사로국에 병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문국 멸망(4세기 중반~5세기)에서 문소군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시기(8세기 중엽)까지 조문국 일대 명칭은 명확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여전히 조문국으로 불리고 있었거나, 학계에서 논증된 바와 같이 조문군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로국, 즉 신라 통일기에 있어서 조문국의 역할이나 중요성에 대한 연구도 있던데요.
신-이미 학계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죽령이나 추풍령으로 가는 교통로 상에 의성지역을 반드시 거쳐 가야 했기 때문에 중요성이 남달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의성지역의 발굴유물 가운데 탑리출토 금동관과 같이 고구려 계통의 유물도 종종 확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재작년 발굴된 신라 본역사지움 유적의 금동관모에 경우 백제계통에서 확인되는 양식적 특이성이 보여 졌습니다. 이것으로 의성지역의 고총고분 축조집단의 성격과 유물이 갖는 의미는 조금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말씀해주셨듯이 조선시대에도 의성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상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의성에 대해 그리고 조문국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보려면 어떤 자료가 도움이 될까요.
신-현지나 군지를 먼저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관공서에서 나온 기록들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고문서를 수집하는 전문연구기관에 의뢰하셔서 번역본이나 사진자료 같은 의성에서 발간된 자료들을 찾아보시는 게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올해 그리고 향후 조문국박물관은 어떠한 방향과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요.
신-매년 조문국학술회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해 역시 학술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므로, 조금 더 진전된 조문국 연구와 고증 활동이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지역민들에게 역사를 교육하는 ‘조문국 박물관 대학’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성인을 대상으로 5년째 운영될 것입니다. 4회까지는 고고학과 고대사를 중심으로 조문국을 고증하고 주민들에게 교육하는 차원이었다면 올해부터는 고대사 뿐 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시대를 넓혀 의성의 역사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조문국을 바라볼 수 있도록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박물관이 조문국과 역사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구요. 그리고 박물관의 주요 관람객인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을 더 유치하기 위한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과 연계하여 가족체험관에서 월 2회 만들기 체험을 실시 중에 있고, 관람객 누구나 무료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국비사업으로 문화관광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길위의 인문학’의 일환으로 향후에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1,300명을 모집하는 것을 목표로 시행할 예정입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저희가 이미 2년 동안 진행 중에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 상주와 칠곡, 안동에서 많이 찾아와주시고 계십니다. 조금 더 활성화 시켜보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학 동안에는 ‘엄마와 함께 만들기 교실’ 즉, 유아와 엄마가 함께 역사유물을 만들고 감성교류도 해보는 사업도 시행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의성조문국박물관은 보다 다양한 전시 및 문화 콘텐츠 개발과 역사 고증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끝으로 의성신문에 하고 싶으신 말씀.
신-조문국박물관이 국가귀속 매장문화재 보관처로서 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를 적극 활용하여 다양한 특별전시, 상설전시 교체와 같은 전시활동도 열심히 할 예정입니다. 의성신문을 구독하시는 의성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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