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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의성의 가치를 높여가자!

의성신문 2010. 4. 5. 14:55

     본지 창간 20주년 기념 인터뷰

건영육영재단 엄상호 명예회장


고향! 의성의 가치를 높여가자!

농촌에도 문화가 있는 공간을 펼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엄상호 건영육영재단 명예회장이 “건영육영재단은 의성지역 미래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장학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했다.

건영육영재단은 지난 1993년 창립한 이래 금년까지 18년에 걸쳐 의성지역의 청소년 가운데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1,080여명을 각급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모두 4억 8,000여만원을 지급하게 되어 명실 공히 이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이러한 건영육영재단의 엄상호 명예회장과 본지 권혁만 발행인은 창간 20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 의성신문이 창간 20돌을 맞이하여 해 주실 말씀이 있다면?

▶ 우선 창간 20주년을 축하드리면서 고향 의성을 위해 창간은 뜻있는 일이라 항상 잘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으니까 관심이 더 컸습니다. 비록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으나, 계속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20년을 내다보고 고향 의성 발전과 의성인을 하나로 묶는 훌륭한 역할을 계속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과거 고향과 얽힌 추억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특히, 고향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했는지요?

▶ 사실 의성 다인면 봉정은 1700년대부터 300여년간 선조들이 살아왔던 곳으로, 선친은 19세에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3여년의 생활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 진주강씨인 강자순자분자(姜淳分)과 결혼 후 만주에서 10여년간 농.상업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1941년 9월 만주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인 1945년 8월 8일 선친께서 귀국하여 서울에서 몇 년간 상업을 하셨기 때문에 서울서 초등학교 1학년 조봉암 농림부장관 때에 토지개혁으로 다인 봉정리로 이주하여 토지를 정리할 때까지 다인 달제 분교에서 3학년 2학기를 보내면서 서울서 비슷한 시기에 전학 온 김영대군과 특별히 가까이 지낸 기억 외 6.25 동란이 일어나 선친의 기지로 경경선을 이용하여 영천과 경주를 거쳐 울산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 외가의 이웃인 현덕기 옹의 차남이신 현석주씨가 울산지구 사령관이라 그 부친과 함께 피난생활을 하여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서울에 있었다면,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데 시골에 갑자기 내려와 6.25를 맞이한 것이 조상님의 음덕과 아버님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항상 남아 있습니다.

그 뒤 다인은 전기가 없었지만 일정시대부터 전기가 들어와 있던 안계로 선친이 이주하여 상업을 하였기 때문에 나는 안계초등학교로 4학년 때에 전학 가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전학 온 안계 전 한의원의 장손인 전하온군과 특별히 가까이 지낸 기억과 졸업 후 안계중학교 1학년 1학기 까지가 고향 의성에서 학창 시절의 전부입니다. 1학년 2학기 때 대구로 전학을 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즐겨 찾으며 놀았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비봉산의 대곡사 및 적조암과 낙동강과의 추억 그리고 안계에서는 안계평야를 이루고 있는 원천인 위수강이 많은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 현재 엄 명예회장님과 관련하여 고향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 영월 엄씨의 시조 임자의자(林義)이신 내성군(奈城君)으로부터 20대조이신 承자南자 승남공(承南公)이 다인면 봉정리의 입향조(立鄕祖)이며, 단종이 사약을 받고 숨진 뒤 몰래 장사지낸 후일에 추서 받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외 충의공(忠毅公)의 시호를 받으신 흥자도자(興道) 선조가 입향조의 8대조로서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노라”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이라는 명언이 바른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동곡(潼谷)희자섭자(熙燮) 선친은 시조로부터 28세손이고, 이곳 입향조로부터 8세손으로 이곳의 후손으로는 31세손까지 1996년도 발행의 영월엄씨병자대동보에 의하면 국내외에 현재 45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실패 이후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언을 주신다면?

▶ 근본적으로 생사(生死)와 자타(自他)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不二)라는 불교 의 가르침에서 항상 실패도 성공도 하나로서 소유와 무소유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나 성공을 똑 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얻은 것입니다. 도인이 도를 닦을 때는 산과 물이 둘이 아닌 하나로 느꼈으나 현실에 돌아오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명구(名句)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 장학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선친께서는 1915년생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정규 학당이 아닌 다인면 봉정리의 대곡사 적조암에서 19세까지 12년간이나 한학을 수학한 것이 장학재단을 설립한 계기가 되었고, 고향으로부터 받은 많은 음덕에 대한 회향(回向)을 한다는 정신이 숨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목적이나 있는 듯이 장학사업이 오해 받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오해로 인하여 의성에 장학사업이 활성화 되게 한 역할을 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 그간 많은 사업과 사회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떠한 일들을 하였습니까?

▶ 불심이 깊으신 선친을 모시고 대구에서 사업을 하는 과정에 부처님의 가피와 조상님의  감응으로 큰힘을 얻게 되어 1977년도에 서울로 진출하여 건영, 건영종합건설, 건영통상, 건영유통, 건영중강, 건영창업투자, 글로리레저, K.Y. 등 국내외에 23개 계열사로 총자산 3조여원에 순자산 7천여억원의 건영그룹으로 발전하는 외 국내외에 주택 30여만호 건설로 100여만명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음해세력에 의한 악성루머로 인하여 대출금 회수조치가 도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흑자그룹의 경영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부는 건영그룹과 같이 억울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2006년도에 자산이 더 많은 흑자기업은 경영주를 퇴출시키지 않는 제도로 부활하였습니다.

당시 활발했던 경영으로 불교방송설립에 큰 재정을 담당하여 선친에 이어 방송국 이사, 군 불교진흥 회장, 한일불교 교류 임원, 중앙신도회 수석부회장 역임에 이어 고문, 불교인재원 이사장, 서울 강남 및 수도권 20여 곳에 도심 포교당 건립에 기여하였고, 민정당과 민자당 등 중앙당 재정운영 위원으로 정치 발전에 그리고 SBS창설 대주주로 참여하여 방송문화 창달에, 고대교우회 제 21〜22대에 현대그룹 정세영 회장이 회장으로 활동할 당시 부회장으로, 그리고 고대 경영대학원 제23대 교우회 회장을 역임한 관계로 교우회관 건립에도 기여하였고, 대한스키협회 대학연맹 부회장으로 스키 대중화에, 유관순 기념사업회 이사, 지도위원,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으로 25여년간 참여하여 재정 지원 등의 활동과, 사명당 기념사업회 고문, 충의공 기념사업후원회 회장, 영월엄씨대종회 회장으로는 10년 이상 봉사하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충효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영월에 충의공기념관 건립에 이어 충효정신 문화 창달을 위한 교육 공간 조성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고향에 10Km에 이르는 벚꽃 길 조성, 건영육영재단 창설 이사와 이사장 역임과 명예회장으로서 인재육성 특히 의성지역 인재육성을 위한 일에 보람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 고향 의성 발전과 관련하여 좋은 말씀과 군민들에게 인사 말씀을 해 주십시오?

▶ 지금까지 25여년간 한일협력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많은 지방자치 기관들을 방문할 때마다 마치 자기 집 안방과 같은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 분위기 외에 모든 분야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선진 일본과 같이 의성군도 지방자치를 꽃 피워 고향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성인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 정신처럼 정진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평소 농민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직업이고 위대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국민들도 농민들로부터 혼이 있는 삶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지방자치에 있어서 농민들을 위해 모든 행정이 집중되어야 하고 밀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농정이 성공할 것이고 나아가 귀농하는 인구가 많아져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질이 향상된 농촌이 될 것입니다.

애향심은 말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들의 조상님들과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후손들에게 항상 찾을 수 있도록 농촌의 가치를 높여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엄 명예회장은 옛 이름을 찾는 노력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했다.  한 예로 다인면의 “비봉산”을 “자미산”으로, “대곡사”를 “대국사”로 등이다. 일정시대 우리 고장의 정기를 꺾기 위해 개명된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았으면 하는 것도 간절한 소망이라고 했다. 특히 비봉산에서 사방시설을 할 때 조금 더 연구하면 사방의 목적과 맑은 물을 함께 모을 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방한 곳곳에 맑고 청정한 물이 넘쳐나게 할 수는 없는지 항상 염원하고 있으며, 그리고 출향인들이 조상님을 찾을 때 편리하게 임도(林道)와 등산로를 잘 연계 개발하면 불편을 덜어주어 의외로 고향을 많이 찾을 수도 있어 도농간의 유대강화는 물론이고 농촌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