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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휘호

의성신문 2010. 2. 5. 06:39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

항일의사 이양준을 기린 친필로 유일하게 안평면 대사리 중앙고속 도로변에 있다


의성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친필이 유일하게 한 점이 금석문 즉 비문에 서각 되어 중앙고속 도로변에 외롭게 서있어 의성군민이나 중앙고속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본지 의성신문을 통하여 그 뜻을 알리려고 정리하여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는 우리민족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하는 슬기, 과학기술의 탁월한 능력 예의와 염치를 중히 여기는 국민성과 세계 제일의 교육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 민족저력에 대한 신뢰는 통치 기반을 관류하는 확신이었고 신념 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가 남긴 휘호는 국내에서 뜻 깊은 곳에 남겨져 있다. 1962년 1월 1일 신년휘호로 혁명완수를 시작으로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유역농업개발기념탑을 마지막으로 500여점에 이른다.

의성군에서 유일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은 1966년 9월에 하사받은 것으로 안평면 대사리의 의사 이양준 선생 순국비 전면 대자 글 이다.

이양준 의사는 1891년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닦아 충효의 교육을 받고, 예수교 입교하여 집사가 되어 청년기인 1919년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이 봉기가 일어날 즈음 이었다.

당시, 서울과 평양의 시위 상황은 평양신학교에 유학차 떠났던 안평면 괴산동 부르골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가 평양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마침,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만세시위를 지켜보았다. 만세시위로 인해 학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김원휘는 3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귀향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도중 김천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지내오던 황금동 교회 김충한 조사를 만나 두 사람은 김천과 의성에서 각각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의견을 나누었다.

3월 6일 쌍계에 도착한 김원휘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를 만나 의논한 후 다음날, 쌍계교회 담임목사이면서 안평면 괴산교회를 순행하고 있던 박영화 목사를 만나 서울과 평양에서의 감격적인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주동이 되어 전국의 만세시위에 발맞추어 의성의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양준 의사는 민족적인 의분으로 호응하여 의성군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운동을 앞장서 일으킨 것이다. 의사는 대사교회 동지들과 거사를 모의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만들도록 하여 시위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대사동에서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안평면 소재지까지 하령에서 삼춘리까지 연 3일간 안평면내 주민들을 모두 일깨워 거사에 참여 하게끔 고취 시켰다. 마침내 3월 19일 도리원 장날을 틈타서 대대적인 거사를 진행하였다. 대사교회의 동지 이이경 이용학 김인식 권해운 등과 규합하여 몸소 선두에 나서서 도리원으로 향해 나아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날 이 운동에 참가한 군중의 행렬은 약 20리 8km에 뻗치고, 그 선두가 봉양면 사부동 흰재 목지에서 안평면 소재지까지 이어져 군중의 행렬에서 일으킨 먼지가 앞을 가리기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히 수 천 명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이때 도리원 주재소 순사들이 출동하였으나 그 기세에 제압되어 제지치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렇게 만세군중들은 도리원 장터로 돌진하니 장판에 있던 장꾼들과 합세하여 항일독립만세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일본경찰은 주위경찰과 주둔군인 일본수비대들이 급파되어 만세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선봉에 나섰던 이양준 의사를 비롯한 권해운 이용학 김인식 이호출 동지 등 11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군중 수 십 명이 구속되었다. 총상을 당한 이양준 의사 등 10여명이 대구로 후송도중 권해운 의사는 순국하였다.

이양준 의사와 함께 9명의 의사들은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양준 의사는 혹독한 문초로 인해 신병으로 6개월 만에 가석방되어 끝내 1920년 향년 29세로 순국하였다. 이양준 의사는 대구형무소 출옥할 당시 아들이 태어났다는 가족의 말을 듣고 기뻐 하기는 커녕, 오히려 탄식하기를 내 어찌 이 땅에 자식 두기를 바랐으랴! 했다하며 임종 시에도 자기 아들에 대해 “장차 이류의 노예로 되기보다 차라리 내손으로 없애 버린다.”고 까지 했다는 내용이 비문에 새겨져 있었다.

순국한 이양준의사의 유해를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시켰으나 1945년 광복 후 성장한 외아들 이귀철 씨가 선고의 얼을 기리기 위해 3.1운동동지회와 의성군의 후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서액을 받아 비석 전면에 대자로 각하고, 비문은 유석우 선생이 짖고, 서각은 최상엽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세월은 반세기가 흘러 까마득히 잊혀가고 있는 오늘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이양준 의사를 되새기며 의성에서 박정희 대통령 휘호가 순국한 이양준 의사에게 애국심을 기린 뜻 깊은 금석문이 중앙고속도로변에서 매일 수 만 명이 스쳐가고 있어 차량으로 지나면 가시권에 있기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 있어야 하겠다고 주장하여 본다.

글 / 김종우(전 의성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