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 잘하면 공짜라는 장사꾼의 광고도 있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하는 옛날의 시조도 있다.
모두들 말의 무게로 사람을 가늠 질하거나 인간성이 경박하고 중후함을 저울질하는 잣대가 된다. 세치 혀가 가지고 있는 힘이 막강해서 완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수월하게 풀기도 하고 순조롭게 진행하던 일들을 꼬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크게 작용하여 전쟁에 이기고 외교에 밀린다면 실속을 잃게 마련이요,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어 놓고 이리저리 변명으로 궁지에 몰리는 경우도 더러는 보았다. 말은 보통 잔꾀와 통한다.
묘수를 부려 상대의 논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는 것이다. 별주부전의 토끼가 구사일생의 위기 탈출이 그렇고, 사극에서 못된 아전들이 어리석은 고을원을 다루는 솜씨가 그렇다. 그럴듯한 말로 상대를 꼬이는 사기꾼 치고 말솜씨가 교활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말의 덕보다 해를 경고 하였다.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화(士禍)가운데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말조심이 첫째였으며, 고추보다 맵다고 하는 시집살이를 무사히 치러 내는 것도 벙어리 삼년의 미덕 때문이다. 보고도 듣고도 모른척하는 벙어리 노릇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는 가르침은 침묵은 금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쓰잘데 없고 헤픈 열 마디 말보다 진심어린 한 번의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나 호사자(好事者)는 설 자리 앉을 자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안가도 될 자리에 가고, 안 해도 될 말을 지껄이는 사람을 어른들은 호사자라 말하였다. 하물며 사회지도자로서의 말은 더욱 그러하다. 시행착오는 소중한 재산이라 말하였다.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위해서 처신하고 말하면 하루가 행복하고, 가족을 위해서 말하고 처신하면 10년 행복하고 나라를 위해서 말하고 처신하면 영원히 행복하다고 하였다.
우리의 얼굴을 살펴본다. 입은 하나인데 눈과 귀는 둘이다. 조물주가 사람을 창조할 때 무엇 때문에 하나의 입에 두 눈과 두 귀를 만들었을까? 이는 하는 말보다 배로 듣고 보라는 조물주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돌려서 말하면 보고 듣는 것의 절반쯤 말하라는 계시가 될 것이요, 말하기에 앞서 견문을 넓히라는 오묘한 섭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듣는 법을 배워라. 경청의 덕을 가져라. 남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지혜를 지니어라. 능동적 경청인이 되어라. 위의 말들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많이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입은 다물고 눈과 귀는 크게 열어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경청(傾聽)이란 말의 뜻을 살펴보자. 경자는 기우릴 경(傾)이다. 남과 대화를 나눌 때는 네 가지를 기울여야 한다.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려야한다. 남이 말할 때는 한마디 한 구절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정성껏 들어야 한다. 그것이 남을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청(聽)자 역시 깊은 뜻의 글자이다. 자획 순으로 쓰다가 마지막에는 일심(一心)으로 끝을 맺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한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것이 청(聽)자이다. 사람은 허심탄회하고 일사불란한 태도로 남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는 겸허한 자세를 소중한 것으로 알아야한다. 일찍이 도인으로 알려진 장자(壯子)는 청무성(聽無聲)의 깊은 철학을 강조하였다.
양심의 소리, 역사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 영혼의 소리, 진리의 소리,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 천지신명의 깊은 소리는 모두들 무성의 소리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고 마음의 귀와 영혼의 귀로 들어야하는 소리, 깊은 소리다.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이 깊은 소리는 소리가 없다. 한없이 맑은 귀와 신령스러운 귀를 가진 사람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욕에 황폐된 혼탁한 귀로서는 깊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무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요, 도를 통한 성인이라 말하였다. 성(聖)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성인은 먼저 남의 이야기와 역사의 소리와 진리의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고 말씀한다. 듣고 난 후에 말씀하는 것이 곧 성(聖)이다. 그래서 성(聖)자는 귀 이(耳)와 입 구(口)와 왕(王)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듣는 것이 먼저요, 말씀하는 것은 다음이다. 귀이를 먼저 쓰고 입구를 나중에 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성(聖)자는 진실로 의미심장하다. 지혜와 체험과 사색이 없으면 피상적으로 듣고 느낄 뿐이다. 귀가 있어도 들을 줄 아는 귀가 소중하다. 문맹이 글을 못보고 색맹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하듯이 정신이 맑지 못하면 깊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글 / 김창회(의성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