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이 옛 고대국가였던 조문국 역사ㆍ문화를 재조명하는 포럼을 지난 11일 의성청소년센터 강당에서 국사편찬위원, 교수, 한국문인협회회원, 향토사학가, 주민, 공무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토론과 함께 가졌다.
포럼에서는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고집에서 1~22대 396년에 걸친 조문국 왕계표가 발견됨에 따라 이에 대한 조문국 역사의 실체를 규명하고, 군민의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을 고취하고 조상의 위대한 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과 역사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중논(衆論)을 펼치게 됐다.
포럼의 좌장은 김갑주 전 동국대 총장이 맡았으며, 토론에 앞서 주제발표에서 박정수 서울 마포구 문인협회장이 “작가의 눈에 비친 조문국”이란 1주제를 역사연구가이며 목포시 공무원인 정성일씨가 “조문국의 역사”란 2주제를 박찬 변호사의 “조문국과 일본천황가”를 신태하 조문국박물관건립추진 범군민연대 공동대표가 대신 3주제로 발표했다.
한편 토론에 나선 김종우 경상북도 문화원연합회장은 조문국 역사와 지역문화의 연계성을 강조했고, 김일수 전 영남이공대 교수는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발전에 조문국의 활용방안을 강조하면서 의성군 차원의 과감한 지원과 투자를 주문했다. 마지막 토론자로 나선 전병해 군청 문화재담당은 앞으로 진행될 조문국 관련 사업들 중 행정부문을 상세히 설명했다. 김갑주 전 동국대총장은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만약을 전제로 “조문국의 실체가 밝혀지면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했다.
이날 "조문국(召文國)은 '왜'의 뿌리이고 일본천황가(日本天皇家)의 시조국이다."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소왕국 조문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가의 조상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날 참석한 군민들에게는 흥분을 일으켰다. 이는 앞으로 학계에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논란의 내용은 의성 출신으로 향토사학과 조문국에 관심을 가진 박찬 변호사가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발표에 나선 신태하 대표는 "기원전 7세기 김학여왕(金鶴女王)이 개국한 조문국은 당시 모권제(모계중심)의 영향으로 여왕인(女王人)을 합성한 '왜(倭)'를 국호로 썼다. 그러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 패망한 연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와 그 후예들이 연의 명문(名門)인 소공(召公)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해 기원전 83년 '왜'를 '조문국'으로 개명했다"고 주장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는 일본 열도에 '왜'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이는 조문국 기록이 남아있는 사서(史書) 중 △산해경 △전한서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신 대표는 말했다. 그는 산해경에서 지칭한 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문국의 전신이며, 조문국 왕손들은 삼한시대 마한왕이 삼한을 통치하던 당시, 신천지인 일본열도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후 왜국과 천황가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권이(卷二) 신라본기이(新羅本紀二)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신 대표는 덧붙였다.
이 책에는 '당시 조문국 왕손 스사노오노미코도는 그의 아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이(亞馬台國)를 세운 후, 서기 173년 모국인 조문국과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서기 231년 조문국 왕자 김효가 세운 감문국을 신라가 정복하자, 히메고 여왕이 서기 232년과 233년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 이 기록들을 정리하면 조문국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83년까지 국호를 왜국으로 쓰다가 기원전 82년 조문국으로 개명했으며, 그 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조문국 왕손이 국호로 왜로 활용했다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일본이 가야 전성기에는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부터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백제계 도래인은 일본 황제를 교체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백제 본기에도 왕자를 일본으로 보냈다는 내용이 여러번 언급된다.
또한 "서기 668년 제38대 천지천왕(天智天王)이 근강령(近江令·오우미리요우)을 제정하면서 국호를 왜에서 일본, 왕호를 천왕으로 개명했다"면서 "백제보다 훨씬 앞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조문국 후손들에 의해 왜라는 국명이 사용된 것 등을 감안하면, 일본천왕가의 뿌리는 백제가 아닌 조문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천황가의 고대사를 기록한 '고지기(高事記) 상권(上卷)'과 '니혼쇼기(日本書紀) 일·이권'의 신대(神代)를 살펴보면, '천상의 신화'를 천지개혁에서 천황가의 조문국 시대까지로 설정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본은 1940년(소화 15년) 당시 본토에서 기원 2600년을 축하하는 대축전을 열었다. 즉 일본의 개국이 한반도에 조문국이 세워진 기원전 7세기에 맞췄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 이러한 측면에서 신 대표는 "당시 대축전은 일본황실이 소문국의 왕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예로 일본은 일본서기에 기술된 일본황실의 발상지인 '소시무리노도고리(曾尸茂梨之處)'를 찾기 위해 1910년 한일합방 후, 우두현으로 불려진 춘천군(春川郡)과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군을 답사한 것을 꼽았다.
당시 '소시무리'는 '소머리산' 또는 '소문(召文)'의 일본식 표기였다는 것과 "고대사는 물론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사학자들이 1914~17년 펼친 학술조사를 통해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군을 일본황실의 발상지로 결론을 내렸다는 추론이 가능하다"면서 "이는 곧 조문국이 일본황실의 뿌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