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3호 향토사이야기 글/사진. 안종화
인조 책봉주청사 이민성에 대하여
(봉양면 장대리 산34번지. 장대서원)
“이민성(李民宬)은 광준(光俊)의 아들이며, 호는 경정(敬亭)이다. 만력 정유년(1597)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글을 읽었다. 광해군 때 홍문관에 재직하면서 글을 올려 국모를 폐한 잘못을 논하였다가, 이이첨에게 쫓겨 10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 이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히고 돌아왔다. 중국 사람들은 그의 학문을 공경하여 ‘선생’이라 부르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장대서원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 여지도서의 기록이다.
1570년 산운마을에서 태어난 이민성. 『변화하는 시대정신의 구현, 자암 이민환 종가』지은이는 민환의 형 이민성을 조선의 가장 뛰어난 리얼리스트(realist) 문학가로 소개하고 있다. 전쟁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신음하는 민중들을 향해 초지일관 따뜻한 시선을 간직하며 참상을 고발하였던 그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몽골 등지를 답사하는 여정을 함께하였던 출판사 사장이 있는데, 이분이 어느 날 기증해 준 수권의 책 중에『1623년의 북경외교』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 조천록(朝天錄)을 먼저 알게 되었다. 따라서 외교관으로서의 이민성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에 모범적이었던 의성 출신의 인물이 있다. 한·일 간 외교에는 조선 최초의 통신사로 다녀왔던 박서생이 있다면, 한․중 외교 분야에는 오늘 소개할 경정 이민성이 있다. 이 두 분의 발자취는 오늘날 한반도 주변 4강을 비롯한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우리가 어떠한 정신과 협상력을 발휘해야 할지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조천록(朝天錄)이란?
조선시대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사찬 여행기를 뜻한다. 시대를 달리하여 용어를 달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이전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여행기는 조천록(朝天錄)이라 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북경에 다녀온 사신들의 여행기를 두고는 연행록(燕行錄)이라 하였다.
조천록(朝天錄)이란 ‘천자에 대한 조공’을 하러 나갈 때의 사행록(使行錄)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명나라가 망하고 난 뒤 청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는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북경)’을 여행한다는 의미를 담아 연행록(燕行錄)이라고 하였는데, 명칭이 매우 다양하였다.
이민성의 기록
정사 이경전의 『조천록』은 공문을 모은 것이고, 부사 윤훤의 『항해노정일기(航海路程日記)는 끝부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민성의『조천록』은 1년이 넘는 여행과 가장 어려운 시기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기록한 여행기로 『경정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민성은 1623년 3월 25일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다음 해 4월 21일 돌아올 때까지 13개월간의 여정과 활동을 일기체로 기록하였다. 3책 56,000여 자 분량에 달한다. 조선 후기의 연행록 중에서 최고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책봉주청사 일행의 왕래 여정, 행로의 풍물과 지리, 공무 수행과 각종 사건 사고, 중국 관원과의 접견과 대화 및 교섭 활동, 각종 의례와 연회, 황제와 중국 조정의 동향, 북경에서의 책봉 주청 활동에 대한 현장 기록과 참고자료 들이다.
시대적인 배경
1602년 그의 나이 33세 때 세자 책봉을 청하는 외교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도 있으나,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54세 되던 해에 명나라에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한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가는 길은 달랐다. 여정도 그렇고 외교 상황도 달랐다.
처음 명나라에 갈 때는 요동을 경유하여 산해관(山海關)으로 갔다. 1621년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요동을 점령한 후로는 ‘해로 사행’이라고 하여 배를 타고서 북경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민성 일행은 평안도 선천에서 산동반도의 등주까지 배를 타고 갔다.
일반적으로는 책봉을 요청하면 군말 없이 교서와 고명(誥命)을 발급해 주었다. 하지만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던 추관(推官) 맹양지와 명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의 보고를 받은 명(明)은 왕위 찬탈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종주국의 인가 없이 일어난 반정을 ‘황제의 권위를 손상하는 행위’로 여기면서 비난하고 있었다. 명 조정에는 명분을 내세우는 ‘동림당(東林黨)’과 현실적 이해를 중시하는 ‘엄당(閹黨)’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후금과의 전황 타개책을 모색하던 군부(兵部)의 입장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군부는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이었다. 따라서 ‘조선 국왕’으로 책봉 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여행일정 및 경로
ㅇ 서장관에 임명되어 여행 준비를 하다.(1623.4.4.~4.26.)
산운마을→유곡역→문경→충주→음죽→이천→광주→서울
ㅇ 서울을 출발하여 평안도 선사포에 이르다.(1623.4.27.~5.23.)
서울→개성→평산→서흥→봉산→황주→평양→순안→숙천→가산→정주→곽산→선사포
ㅇ 항해 중에 명의 도독 모문룡에 협조를 요청하다.(1623.5.24.~6.13.)
우리채→가도→거우도→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황성도→묘도→등주(3,450리)
ㅇ 등주에 도착하여 군문(軍門)에 나아가 인조반정의 실정을 해명하고, 봉래각(蓬萊閣)을 유람하다.(1623.6.14.~6.23.)
ㅇ 대운하의 요충지 덕주에 이르다.(1623.6.24.~7.14.)
황현→황산역→황산일→내주부→회부역→창읍현→유현→창락현→청주→금령진→장산현→장구현→제남부→안성점→우성현→평원현→덕주
ㅇ 배를 타고 천진까지, 육로로 북경에 이르다.(1623.7.15.~7.28.)
노군당→상원→화원장→창주→소자구→천진위→한구리→양촌→하서역→곽현→통주→북경
ㅇ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다.
ㅇ 서울로 돌아와 입시하여 주상을 인견하다.(~1624.4.21.)
북경에서의 외교
ㅇ 홍려시(鴻臚寺)에 주본(奏本)과 보단(報單)을 올린 뒤 각 아문을 찾아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였다.
ㅇ 중국에서 조사관을 파견하여 조사하고자 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나 실패함. 다만 북경에서 조사관을 파견하지 않고 모문룡의 총진과 원가림의 등래무원에서 차출해서 보내기로 함.
ㅇ 중국 병부에서 인조를 권서국사(權署國事)로 임명하자는 건의를 함. 인조의 책봉을 가장 반대하던 위대중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여 강경론을 완화
ㅇ 12월 13일 각로(閣老), 6부(六部), 9경(九卿)을 비롯한 백관들이 모여 토론을 벌인 뒤 허가 하기로 결정함. 12월 18일 희종 황제는 조선 국왕 책정을 결정하였으며, 다음 해 2월 13일 인조를 조선 국왕으로, 한 씨를 왕비로 책정한다는 황제의 칙서가 내려졌다.
공의 위패를 모신 장대서원
조선 국왕의 책봉은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들 사신들의 피나는 외교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외교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고, 책봉은 끝없는 투쟁을 벌인 결과였다.
이들 사신 일행의 여행 일정과 북경에서의 활동을 기록한 일기를 남긴 이는 금성면 산운마을 출신의 경정 이민성이다. 다만 이민성의 묘는 봉양면 신평리에, 그를 배향하는 장대서원은 봉양면 장대리에 있다. 마을 맨 뒤쪽 산허리에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 위에는 공을 배향하는 사당인 경현사(景賢祠)가 있다. 이 서원은 1610년에 오봉 신지제가 후진을 기르기 위해 강당을 건립한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1672년 사당을 세워 신지제를 제향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민성을 병향(幷享)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