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610호-강릉(江陵)의 문화유적 답사

의성신문 2017. 6. 27. 10:36



강릉(江陵)의 문화유적 답사


자고로 관동지방은 아름다운 산수의 명향이다. 그 중에도 一 강릉에, 二 춘천이요. 三 원주에, 四 철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그 중에 여행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지난 달 30일은 의성문화원이 문화유적 답사의 날로 정하고 행선지는 강릉이요, 단오제(端午祭)를 살펴본다고 하였다.


이른 아침 김주수 군수님 내외분 환송을 받고 출발하여 상주-영덕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영덕휴게소에 잠시 들렸다가 곧 출발하여 4차로인 7번 국도를 따라 좌측은 아름다운 산천이요. 우측은 드넓은 바다를 살피며 쌓였던 회포에 심신을 안정시키고 한참 달리다가 경상도를 벗어나 강원도 삼척(三陟)에 들어섰다. 여기서 시멘트로 포장한 동해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옥계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달려 강릉의 남대천(南大川) 강변에 이른 때는 11시 40분이다. 이곳은 원래 관동(關東)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는 곳이지만 산업이 발달하고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과 직거래가 형성되자 지방 도시로서는 번화한 선진도시이다.


거리도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주변의 모퉁이를 돌아 대형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버스 다섯 대의 200명 인원이지만 한자리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점심을 달게 먹고 남대천의 다리를 건너 단오제 현장에 다다르니 투호, 씨름, 그네, 농악, 가면극, 서커스 등이 공연되고 다른 지방과 대동소이 할 따름이다. 맞은편은 잡화가게와 먹거리가 나열되어 있고 식당마다 손님들로 가득하니 한마디로 풍요로운 세상이다. 나이 탓인지 피로를 느껴 느린 걸음으로 와룡선생 상경기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정해진 시각에 대절버스 앞에 집결하였다. 문화원 인솔자가 인원을 점검하고 승차하여 다음 행선지 오죽헌 문성사에서 모두 하차하였다.


여기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래는 원래 이곳의 토반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집이었다. 그가 이 집을 사위 이시온에게, 이시온은 외동딸 용인이씨에게 물려주었다. 그 딸은 신명화와 결혼하여 사임당을 낳았으며 사임당 역시 이원수와 혼인하고 그 곳에서 어머니를 모시다가 율곡을 낳았으니 결국 외가로, 외가로 연결되어 상속된 집이요, 터전이다. 경내에는 오죽헌과 문성사, 어제각, 율곡기념관, 안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시립박물관도 함께 자리하였다. 오죽헌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요. 문성사는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고을원의 선정비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우리고을 출신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선정비도 있으며 이광준을 모신 충노(忠奴) 문동이(文同里)의 정려비도 서 있다. 매우 감회롭다.


돌아보면 강릉은 본래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지이며 고구려 때는 서하량(西河良)이라 하였고 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에는 서하주(西河州), 명주(溟州)등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와서 강릉 대도호부로 세가 확장되었으며 1995년 시군이 통합될 때 강릉시가 되었다. 꽃은 백일홍, 나무는 소나무, 새는 백조이고, 인구는 22만으로 관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북쪽은 양양군, 서쪽은 홍천, 평창, 정선군이며, 남쪽은 동해시와 접하고, 동쪽은 드넓은 바다이니 농업과 수산업이 함께 발달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말들 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강릉 김씨와 강릉 최씨가 고을의 대성이요, 많은 인재가 배출 되었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놓은 분을 소개하면 남녀 각 2명을 들 수 있는데 여성 두 분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여성들이다.


첫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梅月堂), 본관은 강릉이다. 시중 태현(台鉉)의 후손이며 3세에 이미 시를 지었고, 5세에 중용, 대학을 통독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13세까지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불태워버리고 스님이 되어 호를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 동안 여러 작품을 저술 발행하고 1465년에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하다가 2년 후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원각사의 낙성에 참여하고 산거백영(山居白永)을 저술하였다 일평생 절개를 지키면서 유교불교의 사상을 아울러 발전시킨 사상가로 문장이 탁월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육신사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다음 이이(李珥, 1536-1584)는 학자요, 문신이요 정치가요, 교육자이다. 별명은 견용(見龍), 자는 숙헌, 호는 율곡(栗谷)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 강릉출신이며 어려서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고 13세에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23세 때 도산에 거처하는 이황(李滉)을 배알하고 계분수사파(溪分洙泗派) 봉수무이산(峰秀武夷山)의 시를 읊어 곧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통연원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생원과 문과에 연이어 장원하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기호학파의 영수로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동서분당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죽었다. 사후 종묘와 문묘(향교)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가 소년시절 읊은 시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오언율시(五言律詩) 한 수를 옮겨 적는다.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 속 정자에 가을도 이미 늦으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 읊는 나그네의 회포 끝이 없어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물은 하늘과 맞닿아 푸르기만 하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잎 햇빛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바퀴처럼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 어디메 날아가는가.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그 소리 구름 속에서 끊어지네.

 

다음 신사임당(師任堂, 1504-1551)은 여류시인이요, 서화가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진사 명화(命和)의 딸이요. 감찰 이원수(李元守)의 부인이며 율곡의 어머니이다. 효성과 지조가 높았으며 시문(詩文)을 익히고 그림과 침공자수(針工刺繡)까지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그림에 뛰어나 산수도, 초충도가 유명하며 한시(漢詩) 사친(思親)은 너무나 유명하고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다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별명은 경번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의 딸이요. 조선시대 대표적인 소설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의 누이이다. 시인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우고 홍문관저작(箸作)을 지낸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금슬이 원만치 못했다고 하였다. 시작(詩作)은 섬세한 필치로 여성특유의 감상을 노래했으며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룩했다. 그의 작품은 동생 허균을 통하여 중국에서 간행되어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차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안동에서 저녁을 때우고 귀가 하였다. 장장춘일 긴긴해를 문화원의 알뜰한 주선과 옆자리의 친구를 잘 만나 불편 없이 돌아왔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