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먼저 모름지기 뜻을 크게 가져라

의성신문 2017. 5. 29. 11:04



먼저 모름지기 뜻을 크게 가져라









“먼저 모름지기 뜻을 크게 가져라” - 이 말은 율곡(栗谷) 이 이(李珥 : 1536~1584))가 20세 때에 쓴 『자경문(自警文)』의 첫 머리에 나오는 글귀이다. 자경문은 율곡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3년 상(喪)을 치루고 난 후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1년간 사생관(死生觀)에 관한 마음을 정리하고 나와 그의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릉(江陵)의 외가(外家)에 와서 지은 ‘스스로에게 경계하는 글’이다. 이 자경문은 입지(立志)ㆍ과언(寡言)ㆍ정심(定心)ㆍ근독(謹篤)ㆍ독서(讀書) 등 모두 11개의 글귀로 되어 있는데, 율곡은 이것을 평생 자기 수양의 기준으로 삼고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입지(立志) - 뜻을 크게 가져라. 참으로 귀한 말이다. 율곡은 성인(聖人)을 본보기로 삼고 그 경지(境地)에 도달하는 것을 삶의 준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 이르지 못하면 자신의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삶의 귀한 지표(指標)이다.


율곡은 1577년(宣祖 10년) 그가 42세 때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저술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 머리에도 ‘입지’를 강조하고 있다. ‘초학선수입지’(初學先須立志)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뜻을 세우는 일이다”로 풀이할 수 있다. 또, 율곡은 제자와의 대화 중에서도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萬事)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도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한다.

 

사람이 살아가야 할 목표. 누구나 큰 뜻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해야 한다. 비록 오늘의 삶이 팍팍하고 고단하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을 인내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삶이 아니겠는가.


‘큰 뜻’을 이야기하려면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李秉喆 : 1910~1987) 회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식민지(植民地)의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부자(富者)나라 만들기’에 큰 뜻을 세우고, 1936년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친구 두 사람과 협동정미소(協同精米所)를 창업하면서 그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8년 대구(大邱)로 터전을 옮겨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국민기업 삼성(三星)’의 모태이다.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시련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1951년 1월, 임시수도 부산(釜山)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三星物産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1969년에는 전자산업(電子産業)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의 세계적인 삼성그룹을 있게 한 ‘삼성전자’(三星電子)라는 계열사의 시작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1983년 3월 ‘최첨단 기술만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반도체(半導體)에 도전하였다. 이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 미국에서 반도체공학(半導體工學)을 전공한 최고의 인재를 초빙하였다. 이 회장은 1983년 가을 반도체공장 제1라인 건설을 시작으로 무섭게 일을 추진해나갔다. 이로써 삼성그룹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이 이 회장이 기업을 통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은 인간존중의 기업가(企業家)였다. 그는 언제나 “최고의 인재를 뽑아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원(社員)을 채용했다. 그 출발이 1957년 1월이었다. 그 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공개채용시험을 통해서 사원을 모집하였다. 이것이 그의 ‘인재(人材) 제1주의(第一主義)’의 경영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사업보국’과 ‘인재 제1주의’의 기업가정신(企業家精神)이 짝을 이루어 ‘부자 나라 만들기’의 큰 뜻을 이루어갔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慈雲書院에서 栗谷의 體臭를 느끼다

 

4월 12일, 필자는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자운산(慈雲山) 자락에 자리한 자운서원(慈雲書院)과 율곡기념관(栗谷紀念館)을 찾았다. 이 곳은 율곡의 삶의 흔적이 배어 있으며,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교과서이다. 그리고, 임진강(臨津江)을 굽어보면서 도도하게 서 있는 화석정(花石亭)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 곳 화석정은 율곡이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자연을 즐기고 시(詩)를 노래하고, 나랏 일을 걱정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화석정. 이 곳 저 곳을 돌아보니, 율곡의 체취(體臭)가 물씬 풍겨났다. 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명현(名賢)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움인가.

 

우리가 조선조(朝鮮朝) 519년의 유학(儒學)을 말할 때면 누구나 퇴계(退溪) 이 황(李滉 : 1501~1570)과 율곡 이이를 떠올리게 된다. 퇴계가 영남학파(嶺南學派)의 대부라고 하면, 율곡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부이다. 두 사람은 조선조 유학의 커다란 두 봉우리이다.

퇴계는 19세 때에 송학(宋學)을 대표하는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접하면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 때에는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알고자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50세 때 봄에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안동(安東) 도산(陶山)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그가 68세 때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선조(宣祖) 임금에게 올림으로써 선조로 하여금 성리학(性理學)을 통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충정(忠情)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율곡은 또 어떠한가. 1575년(宣祖 8년)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임금께 올렸는데, 이 또한 선조로 하여금 수기치국(修己治國)의 도(道)를 깨닫게 함이었다.『성학집요』는 『격몽요결』과 함께 율곡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리고, 퇴계는 말년에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모여드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나서 도산서당(陶山書堂, 뒷날 陶山書院)을 짓고, 이 서당을 중심으로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ㆍ한강(寒岡) 정 구(鄭逑)ㆍ월천(月川) 조 목(趙穆)ㆍ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 등의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이 뒷날 영남학파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퇴계와 더불어 조선조 유학의 우뚝한 또 하나의 봉우리인 율곡이 퇴계와 마주앉아 “경(敬)은 성인(聖人)의 학문(學問)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라는 퇴계의 ‘경(敬) 사상(思想)’을 주제로 문답을 했다고 하니,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지난날의 장면을 떠올려보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