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美學 Ⅱ

朝鮮의 名宰相, 尨村 黃 喜

의성신문 2017. 2. 3. 14:12


 

朝鮮의 名宰相, 尨村 黃 喜


권용우 (단국대 명예교수)


1452년(文宗 2년) 2월 8일(음력), 이 날은 방촌(尨村) 황 희(黃喜)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 때 그의 나이 90이었다.
황 희는 세종(世宗) 때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으며, 세상을 떠나면서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또,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어 후세(後世)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리고, 황 희는 1363년(高麗 恭愍王 12년) 개경(開京, 현재의 開城)에서 장수황씨(長水黃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몹시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지만,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또, 책을 좋아했는데, 한 번 듣고 본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황 희는 1383년 사마시(司馬試)에, 1385년에 진사시(進士試)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정시(文科庭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 학관(學官)으로 임명되어 나랏일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은 이미 고려(高麗)가 국력(國力)을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 조정(朝廷)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로 갈리어 매일 싸움판을 벌리고 있었다. 이 때, 명(明) 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함경도 철령(鐵嶺)을 돌려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해왔다. 이것이 요동정벌(遼東征伐)의 단초가 되었다.

 
우왕(禑王)은 최 영(崔瑩) 장군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李成桂)를 각각 좌 ? 우군 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의 명을 내렸다. 이로써 명(明)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어지면서, 고려의 멸망을 자초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때가 1388년 5월 22일이었다. 이성계는 개경(開京)에 도착하면서 회군측 군사들로 하여금 최 영을 체포하여 고봉(高峯, 현재의 高陽)으로 유배보내고, 정치적 ? 군사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때, 이성계의 좌ㆍ우에 조 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이 있었다.

 
1392년 7월 17일, 조 준과 정도전을 좌 우에 거느린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함으로써 조선(朝鮮)이 개국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성계가 조선의 제1대 왕 태조(太祖)가 되었다. 이로써 황 희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임금이 된 이성계를 섬길 생각이 없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비정신을 지켜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과 함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에 몸을 숨기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황 희는 이 곳에 온 72명의 선비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바뀌어갔다. 태조는 새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유능한 인재(人材)가 필요했다. 어느 날, 태조는 황 희에게 친히 글을 내렸다. “그대는 속히 입궐하여 나랏일을 맡도록 하라.” 그러나, 이 글 한 통으로 황 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때, 두문동의 72현(賢) 중 한 사람이 황 희에게 간곡한 청을 했다고 전한다.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쓸모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대는 아직 젊으니 나가서 열심히 일하시오.” 황 희는 이렇게 등떠밀려 조선의 조정에 출사(出仕)하게 되었다. 

    

聖君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렇게 해서 황 희는 조선조정의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 때가 1394년이었다. 그는 성균관 학관에 임명되어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1397년에는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에 승진하면서 순탄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황 희는 태조(太祖) ? 정종(定宗) ? 태종(太宗) ? 세종(世宗) 네 임금을 모셨다. 1449년, 그가 87세 때 영의정(領議政)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57년 동안 긴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세종대왕이 54세로 승하(昇遐)하고, 그 뒤를 이어 문종(文宗)이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런데, 황 희는 네 임금 중 특히 세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세종이 32년 동안 왕위에 재임하는 동안 황 희는 도승지(都承旨)로부터 시작하여 대사헌(大司憲),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43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는 영의정에 오른 후 그 자리에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보필하면서 국정(國政)을 수행하였다. 특히,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성심을 다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구휼(救恤)을 다하였는데, 이로써 세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강원도 사람들도 그를 공경했음은 물론이었다.


한편, 황 희가 영의정으로 재임하고 있는 시기에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었다. 훈민정음을 떠올릴 때면 집현전(集賢殿)의 젊은 학사(學士)들을 생각하게 된다. 성삼문(成三問)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 항(崔恒) 강희안(姜希顔) 이 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뒷날 賢老) 등이 그들이다. 이들 학사가 없었다면 세종대왕이 혼자서 어찌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들 학사뿐이 아니었다. 황 희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대신(大臣)이 없었다면 막중한 국정을 다스리면서 훈민정음 창제(創製)에 몰입할 수 있었겠는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愛民精神)과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과의 만남이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큰 업적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정직과 청렴으로 일관한 황 희와의 만남이 세종대왕으로 하여금 성군(聖君)으로 자리잡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황 희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그리고 18년간 영의정으로서 세종대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까지 조선 519년 동안 제일의 명재상(名宰相)으로 꼽히고 있으며, 세종대왕을 조선조(朝鮮朝) 27대 왕(王) 중에서 가장 어질고 훌륭한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우리가 운동경기를 관전하면서, 때로는 A 선수와 B 선수를 황금콤비라는 말로 칭찬할 때가 있다. 세종대왕과 황 희는 조선 519년 역사에 있어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과 대신으로 손을 맞잡았던 명콤비였다. 1449년, 황 희가 영의정에서 물러나 파주(坡州)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고 있는 동안에도 주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세종은 그의 자문을 구했다고 하니, 세종의 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정부에도 황 희 정승과 같은 고위 공직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 이 글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