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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병기념관 개관하다.

의성신문 2016. 12. 23. 14:25

 

의성의병기념관 개관하다.
120년전 의성의진 들불처럼

일어서 의롭게 싸우다

 

글 / 김정중

(본지 명예기자, 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사무국장) 

 

지난 12월 15일 오후 1시 30분 점곡면 사촌리 363-5번지에서는 신축한 의성의병기념관 개관식이 열렸다. 이날 김주수 군수를 비롯한 최유철 의장, 최태림 도의원, 배광우ㆍ남동화 군의원, 남교희 교육장, 박권욱 경찰서장, 홍종태 소방서장, 김영규 점곡면장 등 관내기관단체장과 김태덕 의병후손대표, 박찬혁 추진위원장(현판글씨씀)과 김창회 전성균관부관장, 김두연 의성향교전교, 신시호 의성문화원장, 경상북도독립기념관장 김희곤 교수, 김홍배 의성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 김점한(사)의성향토사연구회장 등 그리고 각 문중, 유림단체와 경향각지에서 약 200명이 모였다. 김봉회 안동김씨대종회장과 사촌안동김씨문중, 안동김씨문온공파 김수길, 이병옥 광복회의성군위연합회장, 반남박씨군수공파종중, 서점(사)의병정신선양경북지부장, 남주유심회, 이항증 광복회경상북도지부장이 보내온 대형화환이 하얗게 내린 눈속에서 단아한 기념관분위기를 한층 빛내 주었다.

 

의성군청 사회복지과 손창원 계장의 사회로 국민의례에 이어 이삼걸 사회복지과장의 경과보고를 들었다, 건축 연면적 148제곱미터 전시실 118.80제곱미터 규모로 사업기간 2015,01~2016~11 총사업비 10억원(도비30%,군비70%)으로 점곡초등학교 남쪽 도로변에 준공되었다. 박찬혁 추진위원장의 “작지만 감격스럽다”는 인사말에 이어 김주수 군수는 “의로운 고장에 살고 있는 자부심을 에너지로 승화시켜 희망찬 의성을 건설하자”고 역설하였고, 최유철 의장도 “이제 의병기념관을 개관하였으니 멋진 교육의 장으로 삼자”고 인사했다. 최태림 도의원도 축사를 통해 관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약속했다,

 

이어 등단한 김태덕(81세) 후손대표가 종조부 운산공 김상종 의성의병대장에 대해, 조부 소운공 김회종 의병 비화를 말할 때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온 장내가 숙연해지면서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서 개관테이프를 끊은 후 기념관 내로 들어섰다. 기념관 안은 온통 역사교육장이다. 모두가 120년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선 듯하다. 병신의병. 꼭 120년전의 일이다.

 

 

의성 병신의병(丙申義兵)은 1896년 3월14일(음)에 의성향교에서 김상종 의성대장이 선임되었다. 곧 격문과 재격문을 돌린다. 며칠 후 3월25일(음)에 창의(倡義)하여 그해 (음)5월26일까지 62일간 4차례의 큰 전투를 벌이며 항전한다. 이때가 외세의 침탈로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일어난 전기의병이다. 관군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할 때 언제나 백성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1890년대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그때 역시 이곳 의성에서도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1895년 국모시해가 있었고 임금은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때 내려온 칙령인 단발령. 상투를 잘린 선비들은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왜적이 침범하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라며 일어난 의병은 이미 내어놓은 목숨이었다. 27분이 희생된 황산전투 중에 적들은 사촌마을을 모두 불태운다. 500년 동안 살아온 기와의 바다 와해(瓦海) 사촌마을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지독한 가난과 유랑뿐이었다. 경기 이천의 진의 김하락 의병은 김상종 의병장에겐 천군만마와 같았다. 이어 의성 연합의진으로 편성하여 청송 감은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 의성출신인 김하락 의병장은 고향에 와서 연합전투 후 1896년 7월 14일 영덕 남천쑤(남천숲)전투에서 순국한다.

 

전시관내의 영상물에서 김희곤 교수는 “의성의병의 특징은 전투는 피하고 명분만 내세우는 형식적인 의병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의병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곳 사람들은 의로움 하나로 적들과 맞섰던 의병들처럼 폐허 속에서 다시 마을을 일으켰다. 의병항쟁의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촌마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자랑스런 사촌마을. 이런 사실에 후손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사촌마을을 생각해 보면 의병 즉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의롭게 일어났다가 불바다가 되는 아주 가슴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마을을 다시 오늘날처럼 전통마을로 되살려 세울 때까지 정부의 지원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의로웠던 조상을 둔 후손들이 그 조상의 뜻을 그대로 물려받고 마을을 되살려냈다는 뜻에서 의로운 뜻을 이어가는 참 훌륭한 분들의 문중이요. 마을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라고 했다.

 

 

전시관 내에는 김 억 의병후손이 기증한 유물과 영상물도 있다. 모두들 기념관을 둘러본 후 시루떡 등으로 조촐하게 차려진 다과를 즐기며 기념수건을 받고는 기념관 서편의 1km가 넘는 천연기념물 405호 사촌가로 숲을 지나 전통의 사촌마을(沙村)을 둘러본 후 모두 떠나니 선비의 고장 사촌(士村)마을은 또 다시 고요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