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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 이야기3

의성신문 2007. 9. 5. 15:15
 

한국에서 유일하고 최초의 노적봉(露積峯)은

조문국에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적봉설화에 보면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비봉산의 노적봉 전설은 삼한시대 조문국왕이 적에게 포위를 당해 식량이 떨어지자 짚으로 산봉우리를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내용으로 목포 노적봉 전설과 같다. 이는 삼한시대 조문국은 2000여년 전으로 의성의 왕국 조문국에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최초의 노적봉이 현재까지 의성 금성면에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에서 우뚝히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어 우리들 의성인들의 긍지를 한껏 심어주고 있다.


□ 의성의 왕국 조문국을 찾아서 두 번째 본지에 기고한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미광에서 노적봉에 관한 내용을 옮겨본다.

  미광에서 『신라와의 전쟁』이라는 항목에서


[신라구대 벌휴왕이 즉위하여 조문국이 근래 비상히 세력을 얻게 되어 신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하라고 강요하니 조문국왕은 군신을 회합하고 대책을 모의하니 한사람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조문이 적라를 토벌한 후 국민은 교앙심만 있을 뿐이고 실력 내막상 텅 비였고 또 신라와는 강약의 형세가 현격하게 다른 까닭이다. 그러나 끝내 교전하기로 결정하고 신라사자 이인을 참살하니 신라왕은 더욱 크게 성을 내어 그 다음해 김장군이 이천명의 병을 거느리고 조문국을 진공할세 조문왕은 금성산 주위 구천 일백척과 높이 십삼척의 석성을 구축하고 왕이 여기에 주필(머무름)하면서 방전의 준비를 하였더니 신라병은 가음방면으로 진공하여 조성을 포위하고 도전하니 조문은 성을 굳게 지켜 응전하니 신라의 강함으로도 용이하게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내에는 양식이 점점 결핍하는지라 그러나 적의 형세는 한결같이 해이하지 않거늘 조문왕 또 묘한 계책을 세워내니 이는 성중의 적은 산에 볏짚을 덮어서 곡물을 저장하였듯이 적에게 보이고 또 백토를 물에 타서 넘쳐흐르게 하여 쌀뜨물 같게 보이어서 며칠은 버티었으나 아무리 용사가 많다 할지라도 굼주리고는 할 수가 없다. 칠일동안을 불꽃 튀는듯한 격전을 하였으나 말경에는 패배를 면치 못 할 지경에 이르었으나 왕은 진두에서 김장군과 악전고투를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진흙에 빠져들어 진퇴의 자유를 잃었을 때 김장군은 칼을 빼어들고 외치면서 조문왕의 머리를 첬으니 슬프다 끝났도다 영고성쇠는 세상사의 정한  법칙이로다 삼대 백년간 융성하던 조문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노적봉이라 함은 적과 전투를 하던 장수가 산꼭대기에 식량이 넉넉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꾀를 내어서 적을 물리쳤다는 지혜설화.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된다. 산꼭대기와 큰 바위를 짚과 섶으로 빙 둘러싸 식량무더기로 위장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할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것이다. 군량미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는 위장전술로 싸우지도 않고 적을 물리쳤다는 이 설화에는 냇물 상류에서 횟가루를 풀어 물을 부옇게 만듦으로써 쌀뜨물로 위장하여 왜적이 겁을 먹고 물러나게 했다는 쌀 씻은 물 대목이 첨가되기도 한다.

  이 노적봉은 전쟁과 식량난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한 위장이거니와 식수난도 식량난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적으로 하여금 후퇴를 유도한 설화로 전하고 있다. 의성에서 조문국 박물관 건립을 염원으로 전 군민들은 한결 같이 기원하고 있다. 멀지않은 시기에 박물관 건립되기 이전 우리 모두 함께 조문국에 관한 사료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자료 /의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