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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국 이야기1

의성신문 2007. 9. 5. 15:08
 두 번째,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쓴 조문국 사료 <미광(微光)>


의성지역에서 존재하였던 조문국(召文國)은 이천년간 아득하게 긴잠에서 이제 큰 기지개를 펴고 있다. 최초로 고려 인종(1145년)은 조문국 존력 천년 후에 김부식에게 우리의 역사를 정리케 한 『삼국사기』 가운데 몇 자 안 되는 기록인 조문국을 역사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소홀히 다루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후 조선조 의성현령이나 선현들이 남겨둔 기록으로 유호인의 “영신곡”, “송신곡”, 우천 박장춘의 “과조문국유감(過召文國有感)”, 여헌 장현광의 “봉대(鳳臺)”, “백장(百丈)”, 미수 허목의 “과조문국유감”, 이우신 오극겸이 남긴 사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시대 大正15년(1926) 산운주재소 적도교웅(荻島敎雄)이란 일본인이 지금의 금성면 일대 옛 조문국의 터전에 와서 보니 그는 신라이전 조문국 왕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역사학을 연구하였거나 아니면 그들이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하려고 계획적으로 전문인을 파견한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지역민들을 회유하면서 강압적으로 많은 조문국 유물을 그들의 본국 일본으로 상당량이 유출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문화유적ㆍ 유물에 관한 역사 인식이 희박하였고 뿐만 아니라 강점기시대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 실정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는 지식층에 있는 지역민 20여명과 함께 <미광>이라는 서책을 1926년에 가로12.2㎝×세로18.1㎝ 55쪽에 달하는 조문국 사료집을 펴냈다. 필자는 의성군민께서 2000년대 의성문화원 원장 소임을 맡겨준데 대한 책임으로 제일 먼저 조문국 자료집을 구성하여 간행하려고 힘을 기우렸다. 현재까지 자료의 빈약함에 통일신라시대 석탑시대까지로 시대적 구분을 매기면서 신국판 550여쪽에 달하는 “의성의 고대사회”를 2001년 10월 25일 이상현 연구위원과 함께 나의 우거에서 완성시켰다. 이 “의성의 고대사회” 자료수집 과정에서 빙계계곡 빙혈안 석벽에 조문국과 일본이 쓰여진 곳에서 <미광>을 찾았다.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미광> 사료를 찾기 위하여 빙혈에 사료를 구성한 대구 박찬 변호사님을 여러 차례 찾아서 미광을 보여 달라고 부탁을 드렸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안타까워하던 중 의성의 한시모임인 소주음사회가 시내 식당을 돌아가면서 모임을 하길래 우리문화원 공간을 활용하게 하였다. 원로 어른들이 모임으로 혹시나 <미광>을 아시지 않을까하고 소주음사회에서 말씀드렸더니 의성읍 업동의 임종기 선생께서 가지고 계셨다. 임종기 선생께서 오히려 더 반기며 즉시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가셔서 가져와 문화원에 주셨다. 이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쓴 조문국의 간략한 사료지만 <미광>으로 일본인 그는 겸손하게 아주 겸양으로 책의 제목까지 조심스럽게 어렴풋이 미미한 의미지만 그 또한 빛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큰 빛으로 비추어 질 것을 예측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보겠다. 이제 와서 보니 더욱 고맙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 적도교웅 그는 <미광>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吾人은 一層 人生이란 夢幻泡影의 感을 不堪하엿노라. 이제 茫然한 古史를 쓰랴고, 붓을 드니 材料의 蒐集이 無路한지라, 或은 由來의 傳說을, 或은 古人의 遺集을, 或은 現在의 實跡에 鑑하야 召文國이 잇섯다는 그것만이라도 世人의게 紹介하랴는 徵誠에 不過하다. 따라서 遺漏가만횰것은 또한 免치 못하겟스니 識者의 斤正을 바람니다.”


이를 금성면 출신인 김규선 박사와 의성읍 팔성리 거주 학사 신기팔 선생님께 국역을 의뢰하면서 그나마도 친일관계 또는 지역사회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이는 우리들의 의성, 이천년전 조문국 사료의 일부분으로 가볍게 소홀히 넘길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조문국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역사의 진정한 사건들의 행위자는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에서 숨겨진 불변항을 찾아내어 밝혀야 하는 일이 역사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시대구분이 있어야한다. 그 시대 조문국시대는 고대사회로 체계적인 연구 자료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설득력 있는 해명은 현재도 미래도 꾸준히 우리들과 다음 세대들이 찾아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정리하는 과정에 거론되는 내용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며 종래에 전해 오는 인식들을 받아들여 이해한 내용 중에서 선택하여 가야한다. 오늘날 향토사학자들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지나친 주장에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관한 일들은 향토사학자, 향토인들에게 전해오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조문국의 역사와 유물, 박물관 건립 등에 눈을 돌리고 있다. 늦었으나 지금 아니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의성지역에 대구 ㆍ 경북 안에 찬란한 신라문화의 기틀을 이룬 조문국의 터전이 있고, 많은 유적ㆍ 유물이 남겨져 있다. 이천년간 잠자던 조문국은 이제 세계 속으로 한국에서 빛나는 고대사회 국가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미광>은 일본인의 저작이지만 우리들 조문국 사료로 인식하면서 쉬운 말로 국역하여 잃어버린 왕국의 유물을 찾아 박물관을 건립하려고 뜻을 모으고 있는 차제에 <미광>을 재간행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료 /의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