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문신 이사관(李思觀, 1705~1776)은 영조 당시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호는 장음(長陰)이다.
초년시절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당시 충청도 예산 땅을 지나가다가 겨울 날씨라 눈보라를 만나게 되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데 가마 안에서도 턱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눈보라 속에 어느 사람이 무인을 부축하고 쩔쩔매며 허둥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가까이가서 상황을 들어보니 그는 예산에 사는 생원 김한구(金漢耈)였다.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다가 그만 도중에서 아내가 산통(産痛)이 오는 바람에 혼자서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길에서 해산을 했다가는 산모도 애기도 모두 위태로울 것이다. 사태의 급박함을 감지한 이사관은 우선 자기가 입고 있던 양피 두루마기를 벗어 산모를 덮어주고 자기의 가마에 태워 인근의 민가에 데리고 가서 미역과 쌀을 공급한 후 정성껏 산모를 보살펴 주고 가던 길을 떠났다.
이사관은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누가 찾아왔다기에 나가보니 몇 해 전에 눈보라 속에서 고생하던 김생원 이었다. 반갑게 맞아들여 안부를 물었다. 그는 그 후 한양으로 이사를 와서 그럭저럭 살고 있으며, 그때 태어난 딸은 잘 자라고 있노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은혜는 이승에서 못 갚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갚겠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말을 마치고 김생원은 그날 이사관이 산모에게 덮어주었던 양피 두루마기를 내 놓았다. 이사관은 웃으며 ‘나는 이미 다른 두루마기를 하나 구해서 입고 있소 더구나 남의 부인이 입던 옷을 내가 다시 입을 수 있느냐.’ 하며 받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눈보라 속에서 태어난 김생원의 딸은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가 되었고 자색이 남달리 빼어났다. 그때 마침 영조대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고 나라에서 새 중전의 간택령(揀擇令)이 내렸다. 한양에서 내노라하는 명문가집 규수들이 중전의 후보감으로 구름같이 모였는데 여기 김생원의 따님도 어쩌다 말석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조대왕께서 친히 간택에 임하시었다. 대왕께서 ‘꽃 중에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느냐.’하고 여러 규수들에게 물었다. 어떤 이는 화중군자 연꽃을, 또는 화중왕의 모란을, 오삼고절 국화를 말하는데, 유독 김생원의 따님은 이름 있는 꽃을 제쳐놓고 볼품없는 목화 꽃이 가장 좋다고 하지 않는가.
엉뚱한 대답이라 영조대왕께서 그 이유를 물으시니 ‘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목화꽃은 향기가 없고, 색깔도 현란하지 않으니 이는 사람을 현혹시키지 않으며, 흰색이니 이는 순결을 뜻하는 것이며, 열매는 부드러운 솜을 생산하여 규수들이 방적(紡績)을 배우고 백성들의 의복이 되기 때문이옵니다.’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아뢰니 영조께서 무릎을 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다음은 ‘그러면 과인이 거처하는 이 전각의 처마에 서까래가 몇 개나 되는고’하고 물었다. 모든 규수들이 머리를 쳐들고 그것을 세어보고 대답하였다. 김생원의 따님은 다소곳이 앉은 채로 몇 개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대왕은 이상하게 여기시고 ‘너는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고 하문하시니, ‘저는 상감마마의 안전에서 어찌 머리를 들고 세어 보겠습니까. 다만 전각의 처마 끝에 낙수(落水) 자국을 세어서 알았사옵니다.’하고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용안에 미소를 띄우시고 ‘허허 그래 총명하고 기특한지고’ 하시며 곧 김생원의 따님을 중전으로 간택하시니 이분이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이다.
이렇게 중전이 된 정순왕후는 평소 부모로부터 누누이 들어온 이사관의 은덕에 대해 그 은덕의 백 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했다.
그 당시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 만약 이사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살아있을 것이며, 황차 오늘 같은 영광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부모님의 은인인 동시에 나의 은인이니 반드시 보은하리라 다짐했던 것이었다.
옛날의 어느 누구는 죽은 혼령이 길섶에 풀을 묶어 은혜에 보답했다고(結草報恩) 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정순왕후는 ‘상감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첩에게 소청이 하나 있사옵니다.’하고 아뢰니 대왕은 ‘허허, 곤전(坤殿)이 과인에게 소청이라니 말씀해 보구려 내 힘이 닿는 일이라면 들어 주겠소’ 하였다. 마치 귀여운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그윽히 중전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하였다.
정순왕후는 지난날의 어려웠던 상황과 이사관의 선행을 소상하게 아뢰고 나서 ‘일개의 미물인 짐승도 은혜를 안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오리까. 오늘날 신첩이 상감마마를 모시게 된 것도 모두 그 사람 덕분이옵니다.’하고 고운 눈매에 이슬이 맺혀졌다. ‘과인은 곤전의 소청이 어려운 걸로 알았는데 그것이야말로 과인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는 일이요. 곤전의 보은지심에 과인이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소’하고 곧 호조판서에 제수(除授)하니 정순왕후는 감읍할 따름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영조께서 즉위 51년이 되는 을미(乙未)에는 세손이 정조에게 양위하실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시켰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은 이사관과 같은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적선이 있으면 당대에 음덕양보(陰德陽報)의 일도 있고, 후대발복(後代發福)의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도 아니면 죽어서 삼도천(三途川)을 건널 적에 물살이 약한 곳으로 건너게 인도하여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한다. 젊어서 못된 짓만 가려서 하다가 백발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고 부처님의 다리를 잡고 통사정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고 말들 한다.
아! 물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말은 한번 하면 거두어 드릴 수 없다.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지만 성글어도 빠트리지 않는다. 하였느니라.
202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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