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世代는 歷史上 類例를 볼 수 없는 激變의 時代를 살아왔다. 한 世代 동안에 세상은 農耕社會, 産業社會를 거쳐 知識情報化社會로 변했다. 日帝强占期를 살아왔고 光復의 기쁨을 맞이하였으며 左右의 極甚한 對立과 同族相殘의 戰亂도 겪었다. 사는 방식도 변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변하고 價値觀도 변했다. 이제 우리는 農耕社會와 선비생활을 목격하고 體驗한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一九五Ο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나 그보다 늦게 자라난 사람들은 선비를 본 사람들이 드물다. 이제는 선비의 모습을 남의 말을 듣거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텔레비전마저 선비를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선비의 올바른 典型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선비는 端正하였다. 衣冠을 整齊하고 行動을 愼重히 하고 表情은 溫和하고 學問을 사랑하고 부단히 敬工夫를 해서 마음이 언제나 화평하고 즐거웠다. 사람들을 대하면 상대방을 配慮하고 謙遜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였다. 붓을 들면 端雅하고 流麗한 글씨가 피어나고 글을 지으면 짜임새 있고 理致에 닿는 아름다운 文章이 자연스레 펼쳐나왔다.
옛날에는 이런 선비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런 선비들이 참으로 귀하다. 千萬多幸으로 지금 나에게는 이와 같은 옛 선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친구가 있다. 그가 바로 東泉이다. 그에게는 항상 香氣가 난다. 이제 그의 글을 모은 책이 발간되어 좌우에 둘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향기 나는 花草를 옆에 두는 것과 같은 복된 일이다. 東泉의 姓은 安東金, 이름은 昌會, 字는 順益이며 一九三五年 乙亥에 義城 沙村에서 태어났다. 그는 十八世紀 後半 大山 李象靖 先生의 嫡傳高弟로 當代 嶺南의 大學者 川沙 金宗德 先生의 冑孫이다. 東泉은 어린 시절 抗日精神이 투철한 祖父 一巖公이 東泉을 倭政學校에 入學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집안의 사랑방에서 漢字 初學敎材를 익히고 典故와 역사를 工夫하게 하였다. 이것은 結果的으로 우리 사회로 봐서 多幸한 일이 되었다. 李家源 先生과 李佑成 先生도 初年시절 그러했다. 이 두 분 敎授는 옛날의 선비처럼 文史哲을 通達하고 格에 맞는 漢文을 自由롭게 驅使하여 學界의 泰斗가 되었다. 鄕村에 묻혀 사는 東泉도 이분들과 같이 막힘없이 自然스러우며 언제 읽어도 高尙한 品位를 간직한 아담한 文章으로 글을 썼다.
그는 弱冠에 生計의 수단으로 地方公務員이 되어 面, 郡, 學校에서 行政職으로 일했으며 慶尙北道 道立 義城圖書館長을 끝으로 定年 退任하였다. 그는 平生 선비의 素養을 기르는데 게을리 한 일이 없었고 退任 後에는 儒林社會의 指導者로 爲先事業 敎化事業 著述活動 등 全分野에 걸쳐 크게 貢獻하였다. 그 著述活動을 살펴보면 漢詩와 序文, 記文, 行狀, 告由文을 비롯해서 神道碑, 遺墟碑, 事蹟碑, 墓碑文을 지었으며 慶尙北道 新廳舍와 慶尙北道 議會 上樑文을 지은 것은 特記할만한 일이다. 이 밖에도 편지글, 紀行文, 論說文, 講演文, 隨筆 등 훌륭한 작품이 많다.
또 儒林에 적극적으로 參與하여 義城鄕敎典校, 成均館副館長, 博約會 부회장 등 重任을 맡았고 尙州道南 永川臨皐 光州月峰 奉化三溪 慶州玉山書院 등 수많은 院祠의 首任을 맡아 嶺南儒林을 이끌어 가고 있다. 陶山書院 선비文化수련원에서 풍부한 사례를 곁들인 名講議를 十數年간 계속하였으며 月刊紙 漢字文化에 珠玉같은 글을 每月 실어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東泉은 方正醇美한 書體를 創出하여 嶺南의 큰 書院들의 復院 당시 位牌를 題主하고 日省齋 同樂館 등의 懸板을 썼다. 지금 우리가 잊혀져가고 있는 아름다운 文化의 하나는 옛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東泉의 讀書聲을 靑年儒道會에서 映像物로 제작 錄音하여 社會 各界에 보급했다고 하니 이것은 매우 珍貴한 文化財로 保存되어 많은 後學들이 배웠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東泉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淸福으로 생각한다. 멀리 떨어져 사는 관계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 이 책으로 자주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옛 선비들처럼 자유롭게 漢文을 驅使하는 선비가 거의 없는 세상에서 이 책은 今世紀 韓國 漢文의 稀貴한 資料로 길이 남을 文獻이 될 것이다. 以後에도 이러한 책이 몇 번이나 더 나올 수 있을까?
이러한 훌륭한 文化事業에 도움을 주신 義城郡 金周秀 郡守님의 큰 配慮에 깊은 感謝를 드린다. 끝으로 東泉이 더욱 健康해서 참선비의 典型을 자라나는 世代에 오래 보여주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頭緖없이 글을 엮어 序文으로 삼는다.
二Ο一六年 丙申 小春節 退溪學硏究院理事長 理學博士 李龍兌 謹序
社團法人博約會長
※ 최근 본지 주필이며 성균관 부관장을 역임한 東泉 김창회 선생의 글을 모아 엮은 ‘東泉散稿’ 발간됐다. 李龍兌 退溪學硏究院理事長 理學博士의 序文 원문이다. 李 博士는 義城郡 金周秀 郡守님의 큰 配慮에 깊은 感謝드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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